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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jin Park Nov 10. 2019

11월, 어떤 사랑은 한 세계의 문이라는 것을

사랑의 형태 <내게 무해한 사람>

기억 속의 어떤 사람은 스웨터에 붙은 고양이털처럼, 나의 어떤 시절에 엉겨붙어 있어서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를 억지로 도려낸 그때의 나는, 얼굴만 잘린 사진처럼, 한쪽 소매가 없는 셔츠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기괴합니다. 


그 사람을 만났던 당시의 나는 아마, 손으로 만져지는 몸과 거울에 비친 몸의 상을 아직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였겠지요.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완충 지대도 지을 줄 모르고, 삶의 테두리 따위 없으면 그만, 이라는 호기로 움직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영부영 너무 많이 선을 넘고, 돌진하다가 들이받기도 하고, 맞붙은 피부를 찢어내기도 하고…그러고서야 어느새 어렴풋이 윤곽이 생겨버린 나를 마주보고는 아뿔싸, 했을 겁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자꾸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끔찍하게 미숙했지만, 그렇기에 더 없이 온전했던. 이제 다시는 ‘할’ 수 없을 감정의 기억이 소용돌이처럼 검게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질끈 넘어온 이 세계의 문 저편에서, 우리 모두에게는 분명히 사랑할 기회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 읽어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수이의 얼굴에 두려움이 비친 것 같다고 이경은 생각했다. 수이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자신의 장래일까, 돈일까, 나와의 관계일까. 그 모든 것일까. 수이는 늘 미래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왔었다. 마치 자기는 과거나 현재와 무관한 사람이라는 듯이 성인이 되면, 대학에 가면 벌어질 미래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수이는 사 년 뒤의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그것도 한치의 의심 없이 기다려온 미래에 배반당한 적 있는 수이가.(25)


세상에는 그런 자매들이 있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핸드폰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같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같이 살기도 하고, 싸웠다가도 금세 화해하는 자매들이. 그렇게 평생을 친구처럼, 부부처럼,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로 연결되어 있는 자매들이. 서슴없이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매들이.(93)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97)


“마음속으로 언니에게 말했던 적이 많았어. 가끔은 엄마에게도 말했지. 손목이 너무 시큰거린다고 앓는 소리도 하고, 사람들이 너무 밉다고, 화가 난다고 일러바치기도 하고. 그런데도 언니랑 지냈던 시간이 더 길어서인지, 언니가 살아 있는 사람이어서인지 언니에게 더 많이 말했지.” 

나도 그랬었어. 윤희는 무전을 보내듯 주희를 향해 속으로 말했던 일들을 기억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을, 정작 네 얼굴을 보고도 입도 벙긋하지 못할 말들을 중얼거렸었지. 하지만 윤희는 이 말을 주희에게 전하지 않았다. 주희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다가 잠에 잠겼다. 방심한 채 입을 벌리고 자는 주희의 얼굴 위로 박명이 내렸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윤희는 잠이 든 주희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101)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11월부터 멈포드의 서재는 동네 서점 '니은서점'@book_shop_nieun과 함께 엽니다. 3개월간 진행하는 시즌 1의 주제는 '타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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