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무명의 말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은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느낀 우리 자신의 붕괴감이다” 국가의 폭력에, 역사의 실패에, 시대의 무례에, 힘을 지닌 무리의 오만에 맞서는 방법은 기억하는 것이라고, 끝내 아득바득 기억하는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합니다.
일본 군마현의 한 시골 마을에 있는 ‘어리석은 자의 비’라는 비석을 예로 들어볼까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 마을의 공직을 지냈던 이들이, 자신들이 일상적인 업무를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에 가담했음을 반성하고 다시는 누구도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를 않기를 바라며 후세에 전하는 표식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구체적인 ‘기억의 장치’의 힘을 믿습니다. 일본인이며,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역사를 공부한 그가 자신이 겪은 세월호 참사, 국정 교과서 논란, 수요시위 등에 대해 경계인의 시각으로 치열하게 고민한 이 책도 그런 장치 중 하나입니다.
성찰은 간명하고도 빛납니다. 한국이란 무엇인지,를 넘어 국가란, 국민이란, 민주주의란, 정치란, 현실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은 이런 것입니다. “서로 폐를 끼치기에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다.” 저자는 정권이 아니라 시민의 편이고, 제도 이전에 개인의 깨어 있는 이성과 감각을 믿습니다. 우리가 쉽게 ‘한국’이라고 퉁쳐 부르고, 우리 삶의 책임을 넘기려 하는 ‘법’과 ‘제도’, ‘권력’도 공고한 실체가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죽비 같은 책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고유명사화’에 저항하면서 기억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고유명사를 빼고 이 사건을 ‘4.16’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4.16’이라는 시간은 결코 ‘그들’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 충격으로 일상이 깨지면서 우리 모두는 당사자가 됐다. 우리는 세월호를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4.16’은 분명히 공유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은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느낀 우리 자신의 붕괴감이다. 그 암담한 심정, 슬픔, 분노가 ‘4.16’이다.
나를 포함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는 우울감은 몸속에 있는 ‘4.16’이 흐르는 시간에 저항하는 데서 생긴다. 그러니 이 우울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며 쉽게 치유되어서도 안 된다. 누구는 망각을 요구하겠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우울증은 더 깊은 곳으로 잠적할 뿐이다. 2014년 4월16일이 다시 돌아오진 않지만, 16일은 한 달에 한 번, 4월은 1년에 한번 꼭 돌아온다. 시간은 흘러도 멈춘 세월은 다시 돌아온다. ‘4.16’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자 미래에 대한 약속이기에.(15~16)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이 일본에서 5.18을 목도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명복을 빌지 말라’도 그런 시 가운데 하나다. 마지막 구절만 인용한다. “억울한 죽음은/ 떠돌아야 두려움이 된다/ 움푹 팬 눈구멍에 깃든 원한/ 원귀가 되어 나라를 넘쳐라./ 기억되는 기억이 있는 한/ 아아 기억이 있는 한/ 뒤집을 수 없는 반증은 깊은 기억 속의 것./ 감을 눈이 없는 죽은 자의 죽음이다./ 매장하지 마라 사람들아,/ 명복을 빌지 마라.”(60)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푸른 잔디 모임’이라는 뇌성마비자단체가 있다. 그들은 뇌성마비자임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강렬한 자기주장을 했는데, 행동강령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이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타협의 출발이 되는지 몸소 느껴왔다. 우리는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운동이라 믿고 행동한다.” 이런 강령에 따라 이들이 벌인 행동 가운데 하나가 기차역 등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에 대한 반대였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면 뇌성마비자를 비롯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들은 혼자서도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환영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이런 조치에 그들이 반대한 이유는, 이를 통해 ‘정상인’들과 장애인들의 어떤 만남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상인’과 장애인이 함께 산다는 것은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함께 올라가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그들은 보았다. 적극적으로 폐를 끼치는 것을 통해 그들은 이질적인 존재들이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강렬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퀴어축제를 볼 수 있었던 어떤 모습은 불쾌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쾌감이 우리 몸에 새겨진 감각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 불쾌감은 오히려 새로운 사회관계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서로 폐를 끼치기에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71~72)
흔들림을 숨기려 할 때 사람은 고독해진다. 굳게 선 바위는 늘 혼자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다.(100)
눈을 감는다고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꿈꾸기 위해서는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120)
*이 매거진에서 소개하는 책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 동네 카페 '다-용도실'@da_yongdosil 내 공유 서가 '멈포드의 서재'@mumford_salon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11월부터 멈포드의 서재는 동네 서점 '니은서점'@book_shop_nieun과 함께 엽니다. 3개월간 진행하는 시즌 1의 주제는 '타인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