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살롱과 관계된 용어는 뷔로 데스프리를 비롯해 상당히 많았는데, 살롱희극, 살롱 시인, 정원 살롱, 정원 휴게실 등과 같은 말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18세기에도 살롱은 편지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회상록 작가들을 중심으로 모임, 대화, 회의, 어울림, 사교계 특히 서클의 중심으로 일컬어졌다. 베장발의 프랑스어의 보고에서 보면 1793년 한 살롱의 모임에서 살롱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사용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의 파리지도 6권 가운데 남몰래하는 코미디라는 내용에서 1783년 처음 살롱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18 시인 브와튀르가 말한 것처럼 당시 프랑스에는 정해진 시간에 발코니에 나타나는 방법 말고는 여성들이 남성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살롱이 생기면서 상황은 달라졌고, 특히 그곳에서는 가정, 학교, 수도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사교문화와 토론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 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에 모인 사람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자유롭게 즐거움을 찾았다. 그들은 무용, 만찬, 관극 등과 같이 궁중에서 즐기는 오락을 도외시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대화를 통해 교제하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생각을 내놓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므로 살롱은 일종의 '사교장'이자 지성인들이 모인 '사상의 거래소'였다.
49 레스피나스는 일생 동안 대단히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아침에는 편지를 쓰고 책을 읽었으며, 개인적으로 아주 가까운 특별한 방문객 이외에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월요일과 수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2시에 조프랭 부인의 집에서 달랑베르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몇몇 친구를 방문하고 시장을 보며, 음악회나 전시회에 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6시부터 10시까지 손님을 접대했다. 그녀는 가끔 조프랭 부인처럼 살롱에 대한 일을 잊고 한가로이 지낼 때 이외에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60.61 엘베시우스 살롱에는.... 특히 그녀는 자신의 재능, 미모, 재치를 지나치게 내세워 분위기를 망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손님들은 이 여인을 '공주병'에 걸린 것으로 취급하였다. 게다가 그녀는 철학적인 대화를 아주 싫어했으며, 언제나 살롱 한 구석에서 그녀의 가족 중의 한 사람과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듯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어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1760년 돌바크의 살롱과 엘베시우스의 살롱에서, 그리고 네케르 부인의 살롱에서 더욱 대담한 주제를 다루었다."라고 모르네가 말한 것처럼 엘베시우스 살롱이 비록 수준이 낮고 알맹이가 없는 대화를 했던 것으로 평가될지라도 이전의 살롱과는 달리 금서처분을 받은 도서나 정치와 철학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따라서 엘베시우스 살롱은 돌바크의 살롱과 더불어 당시에 유행하던 아카데미와 여러 가지 협회, 독서클럽, 프리메이슨, 카페 등과 더불어 지성과 문예를 창출하고 전파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했던 것이 확실하다.
63 계몽주의 시대의 살롱은 '자기중심이 강한 남성들'이 무사 무욕한 여성들의 후원으로 조화 있게 모여든 장소였다. 이 시대 유럽에서는 살롱을 통해 계몽사상이 한층 수월하게 전파될 수 있었으며, 프랑스는 여전히 '살롱 네트워크'의 중심지였다. 그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재녀'들이 바라던 바와 같이 프랑스어가 그 잠재력을 손색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전문학자들조차 프랑스어를 거부할 수 없었고, 외국의 상류사회에서도 프랑스어를 즐겨 사용했다.
65 살롱은 여성들과 남성들과 또는 바깥세상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살롱은 비공식적인 장소로 공식적인 모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사상을 교환하고, 얼굴을 맞대고서 눈과 눈, 표정과 표정, 몸짓과 몸짓, 억양과 음색, 음색과 음색의 다양하고 실감 나는 표현으로 효과 있고 확실하게 의사전달을 했으며, 나아가서 사회개혁의 의지를 도출하는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사교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롱에서 행해진 일과 대화를 모두 잘 알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수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문학통신과 비밀신문의 기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