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76페이지
그냥 걷는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길모퉁이가 나
오면, 쓱 방향을 바꾼다. 모퉁이를 돌면, 길 앞
의 풍경이 확 달라진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
은 길도 있고, 뜻밖의 내리막길에서 무릎이 후
들거리기도 한다. 넓은 길로 나오면, 멀리서 하
늘이 이쪽으로 천천히 펼쳐진다. 어느 길이든,
길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르다.
마을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사다리 타기 종
이를 스르륵 펼치듯, 길모퉁이를 몇 개나 돌
며, 어디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걷는
것을 즐기기 위해 마을을 걷는다. 아주 간단한
다.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그럴까? 어디로 뭔
가를 하러 갈 수는 있어도, 걷는 것 자체를 즐
기기 위해 걷는 것. 그게 쉽게 잘 안 된다. 세
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가장 간단한 것.
(생각위빙)
그러게... 많이도 걸었었는데
앞 산, 학교 가는 길, 동네 길, 그리고 길
그렇게도 걸어 다녔구나. 즐겁게 그리고는 의도해서라도
추억을 남기기 위해 친구랑도 연인이랑도 가족이랑도 혼자라도
<<심호흡의 필요>> 책이 1984년도로 '아홉 살 인생'일 때를 그림처럼 떠올리다가 블랙홀에 빠지면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설핏 단순해 보이는 글이 사람을 빨아들인다.
순간, 발을 헛디뎌 토끼굴에 의도하지 않게 빠지게 되는 기분이랄까...
시는 어느 순간을 어느 지점에서 내 눈앞에 데려온다는데,
이 글이 그랬고 그랬다. 잠시 블랙홀을 눈앞에 본.
단순함을 끌어올리는 데 있어 필요한 건 '아이'의 눈이라는 작가의 이야기, '왜'라는 물음이 일어나지 않고 그냥 그런 거야라고 살 때가 '어른'이라는 숨 막히는 이야기
질문을 삼키다가 정말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되더라 그래서 안 삼키려고
혼자라도 글을 쓰며 질문을 하고 여러 블랙홀의 기억을 뒤적이며 경계의 끝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냥 그런 건 재미가 없으니
궁금하지 않으니
숨 쉬어지지 않으니
2015년에 작고한 '심호흡의 필요' 작가는 1984년도의 나를 소환해서
숨 쉬게 하고, 1984년도에 다녀오게 한다
5년 전, 성산포 일출을 보러 올라가다가 본, 일출보다 숨 멎는 전경 https://m.smartstore.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