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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사랑>의 작가의 문장

욕망하지 못하는 병을 지닌 그 여자는 그 추운 동네로 가서 살았다

by 홍선






40쪽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밀가루 부대와 양파 자루와 고량주 박스와 면 뽑는 기계와 짜장 소스를 가득 싣고 전국의 초등학교 투어를 하며 그 마을 노인들에게 짜장면과 고량주 잔치를 베푸는 게 꿈이라던 사람도 있었다. 내 아들의 꿈은 열심히 일해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뒤 은밀한 장학 재단을 만들어 학생들의 가능성을 시험하며 자신은 헐렁한 반바지와 슬리퍼를 끌고 여기저기 싱겁게 싸돌아다니는 것이다.

꿈이란 무엇일까. 인간과 꿈은 삶과 죽음처럼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꿈을 이루기엔 너무 무겁다. 꿈을 이루려 한다면 인간의 무게를 줄이고 날아올라야 한다. 타인의 바람을 버리지 못해서, 세속의 질서를 버리지 못해서, 자기 속의 허영과 욕심과 두려움을 버리지 못해서 그 무거운 것들을 이고지고는 꿈에 접근할 수 없다. 이다음에, 언젠가 당신과 내가 함께 살게 되면, 매일 매일이 소풍 같을 거야.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며 생로병사가 들끓는 이 상처투성이 삶 속에서 사랑에 빠지 연인들과 자족을 아는 유목민들은 거창하거나 세속적인 꿈을 꾸지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를 버리는 것 같은 가볍고, 단순하고 ,영속적이고 상처에 붕대를 감는 것 같은 평화로운 소풍을 꿈꾸는 것이다. 우리의 꿈이, 마음속의 무언가를 버리는 데 있다는 역설이 이마를 서늘하게 한다.


사교성 없는 소립자들-전경린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서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12페이지

순간 나는 내 꿈 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16페이지


마시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난 술꾼이라면 질색이니까) 사고의 흐름을 돕고 텍스트의 심부까지 더 잘 파고들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독서는 기분 전환이나 소일거리가 아님은 물론, 쉽게 잠들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니다.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에 걸리기 위해서다. ......11페이지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을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라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9페이지

너무 시끄러운 고독_보후밀 흐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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