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의 남자(3)

by 원숭이마법사

더위가 한풀 꺾이는 듯한 9월이었다.

내가 사는 이곳-하와이 호놀룰루섬은 따로 '여름'이라고 부를 것이 없다. 무더운 '여름'과 다소 선선한 '여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이곳에 살면서, 세상이 이 작은 세계뿐이라면, 굳이 '여름'이라는 단어가 필요할까 생각했다. 차라리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는 편이 이 세계에서는 여러 모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이곳은 계절에 따라 피었다 지는 꽃들, 겨울에 내리는 하얀 눈, 가을에 지는 낙엽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는 결코 극적인 변화 같은 것은 찾기 힘들다. 그저 온도계만이 눈금을 조금씩 달리해 오르고 내릴 뿐이다. 내일은, 다음 주는, 혹은 내달에는, 수은 온도계 속 투명하고 붉은 액체가 오늘의 눈금보다 조금 더 아래에서 혹은 조금 더 위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다소 작은 규모의 푸드 팬트리에서 나는 아침 일찍부터 관광객들이 찾을만한 식품들을 위주로 진열대를 정렬하고 있다. 트럭으로부터 갓 도착한 하와이안 스팸 무스비는 온장고로 옮긴다. 유통기한이 짧은 제품은 앞쪽으로, 갓 들어온 제품들은 진열대 뒤편으로 정렬한다. 요즘은 좀처럼 현금을 쓰진 않지만, 손님들에게 거슬러 줄 잔돈도 충분한 지 계산대 금고를 열고 미리 체크해 둔다. 금고 정리를 마치면, 구석구석 먼지가 쌓인 곳을 찾아 걸레질을 한다.


"아침은 먹고 온 거예요? 쉬엄쉬엄해요."

가게 주인인 나오코가 내 등을 툭 쳤다. 그녀의 손에는 갓 뽑은 아메리카노와 베이글이 종이봉투에 잘 포장되어 들려져 있다. "덕분에 불면증이 사라진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녀가 웃으며 포장된 커피와 베이글을 내민다.

무색하게도 내가 그녀에게 불면증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 특별히 해준 일은 없다. 나는 그저 푸드 팬트리에서 아침을 여는 파트 타이머 업무를 맡았고, 나는 일하는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간 것 밖에 없다.


나오코는 코로나 기간에 이 푸드 팬트리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2020년 초, 일본에서 하와이로 막 건너온 그녀는 코로나가 막 퍼지던 시기에, 파격적인 가격으로 이 비즈니스를 인수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매우 저렴한 가격에 비즈니스를 인수했다고 기뻐했다. 당장은 암울하지만, 조금만 버티면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그랬듯이.


장기간 하늘길이 중단되고, 사실상 국경 폐쇄 조치들이 연이어지며, 관광이 주요 수입원이었던 하와이 주민 대다수의 삶은 고단해졌다. 리오프닝이 되었을 때도 그녀의 고생은 계속되었다.

나오코는 이제 팬트리를 함께 꾸려나갈 직원들을 구해야 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직원으로. 하지만, 쉽지 않았다. 리오프닝 이후,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높아지는 임금을 따라 메뚜기처럼 쉽게 옮겨 다녔다. 빈자리가 생길 때마다 그녀는 작고 가녀린 몸으로 여러 명을 역할을 대신해내야 했다. 매일 12시간 이상 일했지만, 그녀의 '고생길'에는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인생이라는 도도하고 거대한 물결의 흐름에 돌멩이 몇 개를 던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돌멩이를 던질 때에는 잠깐 방사형 원이 그려지며 잔물결은 치지만, 결국 바뀌는 것은 없으니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그녀가 자포자기하던 시점에 내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마법과 같은 등장이라고 했지만, 나는 지금에 와서도 동의하지 못한다. '마법과 같은 등장'이라고 하기엔 나의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시간을 나누어 받는 파트 타이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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