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의 사내의 정체를 조금 더 살펴보자. 남극과 북극을 오가는 패턴을 볼 때, 기후학자 혹은 연구원이 아닐까도 추측해 봤다. 하지만, 기후학자나 연구원으로 보기엔 그의 신체적 특징-예컨대 키와 몸무게, 행동양식, 습관 같은 것들을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우선 190cm에 이르는 큰 키.
물론 누구도 그의 키를 직접 재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사내의 큰 키는 그를 바라본 모두가 공통적으로 동감하는 사실 중 하나에 속한다. 180cm 후반을 주장하는 이들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사내의 키는 확실히 190cm는 넘을 것이다.
큰 키 덕에 역시나 동네 아줌마들을 중심으로 한 때 농구선수설, 배구선수설이 돌았다. 말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그녀들 사이에서는 사내를 TV 경기 중계에서 본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TV에서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군 선수설이 주목을 받았다. 곧이어 고등학교 유망주로 각광받다 부상으로 다친 불운의 은퇴선수설, 연애와 불륜으로 급작스럽게 은퇴한 지역 고등학교 코치설 등 TV드라마 소재로는 나올 수 있는 모든 운동선수 시리즈는 거의 다 나왔다. 새로운 가설이 주목받을 때마다, 가설은 확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며 사내의 정체가 매번 새롭게 정의되었다. 마치 지동설과 천동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농구나 배구 시즌에도 그의 행태는 선수와 거리가 멀었고, 경비원이 사내가 북극과 남극을 오간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운동선수설'은 모닥불 남은 잿더미처럼 완전히 사그라져서는 더 이상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사실 사내와 운동선수 사이에 관련성 높은 행동 특징을 꼽자면, 그가 조깅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아침 조깅은 큰 키만큼 무척이나 선명한 행동 특징이었다. 사내는 매일 새벽 5시마다 달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심지어 천둥 번개가 치더라도 그는 정해진 시간에 집 밖으로 나와 달렸다. 어느 해 여름인가 외출을 자제하라는 태풍 특보가 도배되던 날, 사내의 아파트 주민의 대부분은 태풍 피해 상황보다 그가 달릴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아파트 창문마다 엑스 표시로 테이핑이 된 그날에도 사내는 새벽 5시 조깅을 마쳤다(고 한다.)
새벽 5시, 마치 알람처럼 그의 집 문이 열린다. 낡은 엘리베이터가 그가 살고 있는 층에 잠시 멈췄다가 땡 소리와 함께 그의 집 서서히 내려온다.
5...4...3...2...1
어김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마치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의 등장처럼 박차고 나오는 것은 사내다.
그가 아파트 현관을 지나는 순간 경비실 앞 디지털시계도 마치 아침 인사라도 하듯 숫자를 고쳐 쓴다. 5시 01분.
사내는 경비원에게 인사를 꾸뻑하고는 사라진다. 정수리는 확인할 수 없는 가벼운 목례 정도다. 사내가 사는 가까운 곳의 한강공원. 사내는 그곳을 달린다.
그의 달리기는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누구와도 인사도 하지 않고, 그는 정면의 한 지점을 바라보며 달린다. 그의 무심함이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조깅을 즐기는 이들에 따르면, 사내는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달리는 동안 그는 완벽히 그의 세계에 있고, 나머지는 흘러가는 풍경일 뿐이다. 작은 지역 사회의 구성원 내지는 일원으로 그 어떤 행위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비 효과의 작은 날갯짓처럼 그가 바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달리는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