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하나 가져볼까요?
영어를 쓸 일이 없어서 입이나 머리가 굳는 느낌이 들어 조금이라도 배워 볼 요량으로 성인 영어반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거는 아니고 퇴근한 저녁 시간에 TV로 보낼 시간을 운동과 영어로 할애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수업에 가면 열심히 사는 분들이 참 많구나, 싶습니다. 노는 듯 오는 분들도 있지만 소모적인 데 열정을 쏟지 않고 공부하는 곳에 몸을 담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배울 점이 많단 생각을 했습니다.
수업의 틀은 대략 이러합니다. 1시간의 강의에 한국인 선생님:원어민 선생님이 15:45 또는 45:15를 담당합니다. 수준에 따라 배정되는 시간이 다를 뿐 기본 틀은 비슷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반의 학생 수가 많을수록 영어를 직접 쓸 기회는 그만큼 줄게 되어있지만 그렇다고 내 욕심만 채우는 일도 안될 일입니다. 다행히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일 하나 없이 수업을 잘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 수업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이 제게 부탁 하나를 하셨습니다. 영어 이름을 하나 정해서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수업의 진행에 필요한 모양입니다. 이미 다른 학생들도 그리하고 있었고 다양한 영어 이름이 불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갑작스러운 부탁이었고 그렇다고 아무 이름이나 알려줄 수는 없는 일, 결정되면 알려주겠노라고 말하고 수업을 마쳤습니다.
그렇게 수업은 반복되었고 원어민 선생님이 오셔도 딱히 영어 이름에 대한 강요도 없었기에 때마다 제 이름으로도 불렀다가, 아니면 그냥 Kim으로도 불렀다가, 제가 의사인 걸 알기에 Doctor Kim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냥 Kim으로 불러달라고 말입니다. 따로 적절한 영어 이름을 찾지 못했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이후로 내 영어 이름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문득 책을 읽다가 가톨릭 또는 성공회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가진 세례명(영세명 또는 본명)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인물 또는 믿음의 성인 이름에서 유래하는 세례명은 실제 영어권은 물론 기독교가 전파된 국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문득 제게도 세례명이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소개하기가 참 편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세례명이 그런 의도로 불리는 건 전혀 아니지만 외국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많은 덕을 볼 게 분명할 테고, 같은 교인끼리도 이름의 뒤에 직분으로 존대할 필요 없이 세례명으로 호칭하면 좋을 듯했습니다.
한자식(漢字式) 이름에 익숙한 우리의 작명체제에 세례명이 낯선 건 자명한 일입니다. 실제 제가 근무했거나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서도 종종 세례명이 호적 이름인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몇십 년을 살아올 동안 그들의 호칭에 대해 불편하지는 않았을까요? 신기해하거나 재미있어하는 주변의 시선에,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을까요? 이제는 별게 다 궁금해집니다.
그나저나 지금이라도 괜찮은 영어 이름을 하나 가져볼까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런 마음만 아니라면 하나 가져볼 만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