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씁니다.
자기가 써놓은 글을 시간이 지나 다시 한번 둘러보는 일은 간혹 대담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나? 싶어 다소 생경하기도 하거니와 문맥이 이상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 상황에서 단어의 선택을 이렇게 해야만 했나? 싶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은 茶飯事입니다. 물론 대개는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을 잠시 뒤돌아보는 귀한 시간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여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카페나 페이스북에 게시한 내용을 정리하다가 몽땅 날려버린 적도 있고 그때엔 굳이 복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포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요즘 졸작이지만 내 흔적이나마 남기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손을 대곤 하지만 그나마 양도 적고, 이건 아니다 싶은 건 과감히 버리다 보니 정리하는데 며칠이면 될 정도입니다. 그 이후에 쓰는 글도 언제 도태될지 모를 일이고, 글을 잘 정리하여 책을 내 보라는 칭찬을 진심으로 받아 정말 제가 글을 잘 쓰는 줄 알았던 철없는 중년 역할을 했습니다. 이 착각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마약 같은 효과가 있지만 대개의 마약처럼 부작용도 만만치 않음을 이제는 압니다.
우선 저는 글쓰기에 대한 기초지식이나 기본소양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배워야겠다는 의지도 박약해서 관련 내용을 기웃거려 본 적도 없는 무식쟁이입니다. 학창 시절 어지간한 문예반, 글쓰기 동아리에 몸담은 이력조차 없는 문외한입니다. 그러다 보니 글의 깊이는커녕 전개나 방향이 일정하지 못하고 일관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단어나 수사(修辭)가 유치하고 세련되지 못하기 그지없습니다.
내 글이 ‘나만 보기’로 한정되어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냥 내 선에서 마무리되고 만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이것이 가족에게 읽히고 지인에게 읽히며 독자의 범위가 차차 넓어진다면 사태의 심각성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내 사고의 깊이는 물론 다양함을 논하기에는 제 경험이나 지식, 연륜이 아직은 부족합니다. 그를 보충하느라 노력은 하지만 짧은 시간에 이루기가 쉽지 않고, 또 어디서부터 손을 뻗어야 할지도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제 나이 50쯤 되던 때 우리 직원에게 특별한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의 결혼 주례를 서 주십사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벌렁거리고 얼굴에 땀이 날 뻔했습니다. 생전 처음이라는 낯섦도 있었지만 그를 감당할만한 경륜이나 연륜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글을 노출한다는 게 어쩌면 이런 느낌일 것입니다. 기왕 노출할 생각이라면 남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가끔은 감동도 주고 생각도 하게 한다면 좋겠다는 욕심 정도는 펜을 눌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내 주장이나 의견이 남과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이 시는 西山大師의 詩 悟道頌(오도송)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조선 후기 시인인 임연당(臨淵堂) 이양연의 야설(野雪)이라는 한시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 출처야 어디이든 그 내용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훗날 김구 선생의 휘호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제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그저 내 발자국이 내 행적이 남에게 어지러움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