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낯 모르는 남에게 말을 잘하지 않는 일본 여자들이지만 그 두 사람은 그 날 내 마법(?)에 걸려들었다.
제가 처음 가는 길이라 그러는데 혹시 시즈오카 현[靜岡 縣]에 대해서 좀 아시는지요. 이 열차를 내려서 어떤 교통편을 이용해야 하는지 앞이 캄캄하거든요.
외국인이 자기 나라를 찾아와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을 맘 편하게 두고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특히 여자들일수록. 그렇기에 이럴 때엔 어느 정도 인생의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약간 엄살을 떨면 과분하도록 친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마침 객실의 가운데 통로 맞은편 자리에 앉은 두 여자가 전형적인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공교롭게도 내 옆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예매했던 손님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탑승하지 못했던 것 같다.
볼 일이 있어 시즈오카市엘 가시나요? 아니면 시즈오카 현(縣)에 관광을 하러 가시는지...
시즈오카 현 안에 시즈오카 시가 따로 있다는 소리였는데 물론 그런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행정구역 상 일본의 현 단위는 한국의 道와 같지만 현 안에 있는 대표적인 도시 명을 따서 현 이름을 부르는 곳이 많다. 도청 소재지인 수원시가 있는 도라면 경기도가 아닌 수원도가 되는 식이다. 다만 내가 가야 할 곳은 시즈오카 현에서도 외진 산촌 마을이었던 것이다.
후지노미야 시[富士の宮 市]까지 가서도 후지산 쪽으로 더 들어가야 하는데 제가 그쪽 교통편을 몰라서 그럽니다. 전철이 거기까지 있는지 아니면 버스 편으로 가야 하는지 말이죠.
그 후미진 산속엔 왜 가려하시죠? 후지산을 오르시려면 정규 코스가 따로 있는데....
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관광지인 시즈오카 현에서 하필이면 가장 별 볼 일 없는 후지산 뒤쪽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은 쳐다보았다.
그쪽에 제 친한 사람이 사는데 그 친구가 이번에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가는 중이지요.
결국 열차 안내원까지 동원시켜 지리 지식을 모은 결과 내 여행 코스의 윤곽이 잡혔다. 그런 다음 내친김에 그 여자들은 본전을 뽑으려 들었다. 수많은 질문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인 치아가 고른 이유가 김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인들보다 고른 것은 사실이지요.
맞아요. 나는 한국 남자들을 보면 모두가 BTS 같다니까... 그렇지 않니?
맞아, 정말 그래.
덕분에 나는 지리에 훤한 고향을 찾아가듯 고이치의 마을까지 탈 없이 갈 수 있었다.
지난 12월 중순 시즈오카의 결혼식 하객으로 갔던 날, 여행 내내 고이치를 처음 만났던 특별했던 겨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후지산
이상의 한계에 부딪친 고독한 철학자처럼 남루한 모습으로 그 아이가 내게 온 날은 일본의 관동지방으로서는 수년 만에 쏟아부은 눈발이 그치고 매섭게 바람이 몰아치는 한 겨울이었다. 당시 나는 동경의 서쪽 끝자락인 센가와 시(仙川 市)에서 작은 구두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몇 살이냐?
열아홉 살이에요.
이름이.....?
타카마쯔 고이치(高松 浩一)라고 합니다.
집은 어디니?
.......없습니다.
그 아이가 들고 있는 가방 귀퉁이에 삐죽이 나와 있는 웬 하얀 파이프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건 뭐지?
천체망원경입니다.
추운 한 겨울에 집도 절도 없이 천체망원경이라는 것을 큰 가방에 쑤셔 넣고 떠도는 열아홉 살 소년에게 나는 아직도 질문할 것이 많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전철역에서부터 그 먼 길을 걸어왔다는 그는 아직도 추위에 떨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락이 너덜거려 올이 풀어지려는 스웨터 위에 자기 아버지가 총각시절에 입었음직한 낡고 헐렁한 코트를 걸친 그가 애처로워 보였다.
난로 가에 앉힌 후, 뜨거운 차를 머그컵 한 가득 따라주니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훌훌 마셔대는 모습에서, 중심 잃고 표류하던 내 열아홉시절도 저랬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쭉한 큰 키에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하얀 얼굴. 깊고 선한 눈매. 마음속에서 왠지 모를 요동이 일었다.
무엇보다도 그 추운 밖으로 그 아이를 다시 내쫓을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결정했다.
좋다, 고이치君. 함께 지내자.
참한 젊은이 한 사람을 구해달라는 내 부탁을 듣고 그 아이를 보내준 일본인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그 아이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날부터 내 회사 직원의 일원이 되었던 그 아이는 끝내 내 결정을 후회하게 만들지 않았다.
요즘 젊은 아이들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되는데....라고 했던 옆 집의 닭꼬치 가게 아줌마까지도 결국엔 그 아이를 끔찍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천체 굴절 망원경
우리 직원들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그리고 그르렁 소리가 날 정도로 낡은 승합차를 몰고 틈틈이 거래처를 쏘다녀야만 하는 피곤한 생활에서도 고이치는 밤마다 그놈의 망원경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별을 쳐다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 새벽 두 시가 되어도 내려오지 않아, 자다 말고 쫓아 올라가 호통을 쳤던 일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다가 다가오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겨우 찾아냈어요. 잘 보세요. 저게 게 성운이라는 거거든요.
얼떨결에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내 입에서 “히야~~!”라는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마치 해변가의 암벽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처럼, 굽이치며 하늘을 퍼져나간 그 색색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호통을 치던 내가 오히려 또 다른 걸 보여 달라며 애걸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 아이가 이리저리 망원경을 돌리며 보여주는 대로 들여다본 다음, 내 이럴 줄 알았으면 단호하게 널 돌려보내는 건데, 하면서 웃었더니 고이치도 말했다.
여기가 도심이었으면 저도 올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도심에선 망원경으로도 밤하늘의 별을 볼 수가 없거든요. 산속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긴 별이 잘 보여서 다행이에요.
잠이 달아난 그 날, 맥주까지 갖다 놓고 옥상 난간에 기대앉아 그 아이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혈육이 이복 누나인데, 사진에 미쳐 지금 독일에 있다는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널 돌봐주지 않니?
잡지사 사진기자였던 세이꼬(淸子) 누나 덕에 탈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대학은 안 갔어요. 그 후로 누나가 실망했는지 독일로 가버렸죠.
대학은 왜 안 갔는데?
지금은 공부하기 싫어요. 나중에 가고 싶을 때 갈려구요.
게 성운
우리는 고이치 덕에 천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될 수 있었다. 어느 별자리는 몇 월쯤 어느 쪽에서 뜬다는 것과 각종 성운들에 얽힌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게 성운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서양 사람이 아닌 명나라 때 중국인들이라는 것, 그리고 초신성 폭발로 생겨난 그 성운은 아직도 초속 수천 킬로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결국 고이치가 야간학부에 입학한 날, 나는 그 아이가 평소 갖고 싶어 했던 멋들어진 4인치 굴절 망원경을 선물했고, 주경야독한 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렇게 고이치와 함께 생활한 지 5년, 또 내가 귀국하게 되면서 떨어져 산지 5년 후인 지난 해, 난데없이 전화가 왔다.
저 결혼할 거예요. 그러려니까.....더 뵙구 싶네요.
전화를 끊었어도 고이치의 목소리가 여운을 몰고 오면서그 아이와 함께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차가운 얼굴로 그 아이의 누나가 찾아왔던 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이치가 너무 신세를 졌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제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순간 깜짝 놀라는 나를 돌아보고는 고이치가 당당하게 말했었다.
누나, 난 여기서 신세를 더 지고 싶으니까 차례를 기다려 줄 수는 없을까?
내겐 아직도 별을 쳐다보는 소년으로만 떠오르는 고이치 군.
하지만 산골의 소도시인 후지노미야 터미널까지 마중 나온 고이치는 구레나룻을 기른 원숙한 사내로 변해 있었다.
내가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겠다고 전화로 말했을 때, 고이치는 몇 번이고 물었다.
정말이요? ......정말이에요?
그러던 그가 막상 나를 보고는 와하하, 한바탕 크게 웃더니 그 긴 팔을 벌리고 다가와 얼싸안았다.
왜 이 추운 겨울에 결혼식을 하려는 거니? 도저히 봄까지는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이지?
아직도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있는 고이치가 나를 보며 겸연쩍게 말했다.
왠지 저는 겨울이 좋아요. 그런데..... 저보다도 에미짱(고이치의 신부)은 더 좋아하거든요.
후지산 바로 아랫자락인 후지노미야 시의 외곽, 사방이 둔덕의 차밭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산촌. 그곳 공회당(마을회관)에서 다음 날 고이치의 조촐한 결혼식이 열렸다. 주례는 마을 이장인 이시하라 하치로 [石原 八郞]씨.
결혼식 안내장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름 자에 되도록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식과는 달리, 그저 달랑 '이시하라네 집안의 여덟째 아들'이라는 의미가 왠지 고이치의 마을회관 결혼식처럼 소박하고 정겨웠기 때문이다.
신부의 고향이자 고이치가 새살림을 차릴 그 동네까지 찾아온 신랑 쪽 하객이라고는 아직까지도 독신이라는 그의 누나와 신랑 들러리를 서준 고이치의 두 친구, 그리고 내가 전부였다. 그러니 마을회관에 모인 하객은 대부분 그 마을 사람들이었다. 가뜩이나 웃음기 없는 고이치의 누나 얼굴에 조금 쓸쓸한 기색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과 인사하는 외엔 거의 말 수도 없었다. 고이치가 장가를 들던 그 날, 남몰래 하늘나라에 있는 이복동생의 엄마를 생각했던 걸까.
어쨌거나 반듯한 청년으로 성장한 고이치는 꿈을 이룬 듯했다. 밤하늘이 보이지 않는 유령의 도시(고이치의 표현)를 떠나 별이 잘 보이는 산골마을에 자리 잡고 처남의 운송업을 돕는 번듯한(?) 새로운 직업도 가졌다고 했다. 게다가 아내까지 맞이했으니 그는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였다.
고이치보다 다섯 살 아래인 스물네 살의 새 신부는 고이치의 누나와 처음 보는 내 앞에서 눈물을 떨구었다. 너무도 이쁘고 마음 여린 신부.
어떻게 저런 이쁜 아가씨 마음을 훔쳤냐?
몇 년 전부터 아마추어 천체관측가들의 모임에 나갔어요. 거기서 만난 토모다(友田)상을 따라 여기를 몇 번 내려왔죠. 물론 별을 관측하려고 왔던 거거든요. 그랬다가 그분의 여동생인 에미짱에게 포로가 된 거죠.
북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처럼 털북숭이인 고이치의 처남이 투박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는 내게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모습. 조금은 독특한 취미를 고집하는 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신뢰감이 느껴지던 사람이었다.
'그랬을 테지. 넌 누가 봐도 욕심나는 놈이거든.'
어색한 신랑 예복 차림으로 환하게 웃는 고이치에게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나도 웃었다.
후지노미야 역
일본의 관동지방엔 여간해서 눈이 내리지 않는다. 하얀 후지산의 높은 봉우리가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는 그 마을에도 아직 눈은 없었다. 다만 겨울 산촌답게 으스스 추울 뿐.
하지만 예식 후의 축하 퍼레이드로 인해 추위마저 싹 달아날 지경이었다. 예식이 끝나기 무섭게 그 마을의 전통에 따라 신부를 훔쳐낸 신랑은 죄과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곧 축하 퍼레이드였다. 마을 젊은이들이 사인교 같은, 의자만 있는 가마에 신랑을 태우고 연회장까지 가는 동안 온갖 악을 쓰면서 흔들어댔다.
자칫 가마에서 떨어질 것 같은 신랑은 긴 머리를 날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신부와 함께 뒤쫓아 오는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흔들어대는 강도(强度)가 약하다고 아우성치면서 이웃나라에서 온 하객인 내게도 의견을 물었다.
괘씸한 신랑에게 주는 벌 치고는 아무래도 약하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사전에 가마꾼들에게 뇌물을 먹인 건 아닌지 나중에라도 마을에서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놀이를 처음 보는 내 눈엔 재미있어 보였지만 고이치의 누나는 연회장으로 먼저 간 듯 사람들 틈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가 이런 모습이라도 본다면 혹시 웃을지도 모를 텐데.
마을 식당을 빌린 연회장에서도 신랑에 대한 형벌은 이어졌다. 가뜩이나 술이 약한 고이치지만 마을 사람들이 따라주는 벌주(罰酒)를 일일이 세 번 박수를 치고 합장한 다음 모두 들이켜야 했다. 테두리가 퍼져나간 조금 오목한 접시 같은 전통 술잔에 독한 술도 아닌 청주를 따라준다는 것이 조금 위안이 되긴 했다.
정말이지... 형님... 형님 같았어요, 우 상은.
연회장을 나오며 너무 취해 부축을 해주는 두 친구들의 어깨너머로 돌아보며 고이치가 말했다. 나도 빙그레 웃어주었지만 얼큰한 술기운에 내심 속이 저려왔다.
이제 그와 만날 날이 또 언제일까. 내가 시즈오카의 후지노미야 그 산골까지 찾아갈 날이, 아니면 고이치가 서울엘 올 수 있을 날이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