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속에서 불어대던 스무살의 폭풍
“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거야. 이 파라다이스라는 곳이 차라리 내 상상 속에서만 남았더라면.”
스물일곱 살 무렵, 내가 그동안 자주 말했던 스무 살 시절 옛 추억의 동산을 직접 보고 싶다며 송탄 파라다이스 공원을 둘러본 뒤 당신이 한 말이었어.
그 즈음엔 사실 내 눈에도 그 파라다이스 공원은 황폐한 정원으로 보였는데, 나도 영문을 몰랐지.
전쟁 후에 오산 공군기지를 정비한 뒤 미군들이 만들었다는 그 공원은 지금 생각하면 조금 늙은 뒷동산의 자태긴 했어.
하지만 내 스무 살 시절 그곳은 야구공과 글러브를 챙겨 동틀 녘 자전거를 타고 가서는 아침 운동하러 나온 미군들과 한껏 놀던 천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 최고 미인이었던 동네 젊은 마담이 출근하는 길목이기도 했지.
누구든 스무 살의 눈이라면 세상은 심장의 박동 수에 따라 달라져 보이게 마련이거든.
양키와 그들 여자들이 득실거리는 그 시골.
서울 명동 양화점에서 분점을 열고 나를 그곳으로 보내버린 탓에 꼼짝없이 1년을 갇혀 지내던 그 시기는 프랑스의 그 유명한 해인 1789년처럼 세상이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겪고 있었지.
그러나 한국의 루이 왕과 당통, 그리고 로베스피에르 등이 활개 치며 서로 죽이고 죽던 그런 일들은 산 넘어 풍문으로만 들려올 뿐, 그 시골마을은 그런 풍파와는 전혀 별개의 세상이었어.
그저 미군이 가게로 들어와 “얼마지?” 하면 나는 태연하게 “오십오 불.” 이라고 대꾸하면서 하루가 지나가던 그런 때였거든.
내가 들을 수 있는 영어는, ‘하우 머취’였고, 내가 말 할 수 있는 영어는 ‘휘프티 화이브 달러’였는데, 사실 당시 구두 한 켤레를 25불에 팔아야 했지만, 처음 미군을 맞닥뜨린 나는 그 가격을 얼른 영어로 말 하지 못했던 거야. 그렇게 그 가격이 얼떨결에고정 되었을 때, 처음 나는 그 의미가 무얼 말하는지 알지 못했어.
그래도 세상물정 모른 채 키만 크고 싱겁기 그지없는 그들은 번쩍거리는 구두를 안고 돌아가 다음 날 일본으로 여름휴가를 떠나곤 했지.
송탄 그 작은 시골동네 어딜 가든, 하다못해 김치를 사러 시장엘 가도 달러가 통용되는 곳이었어.
당시 1불이면 무조건 500원이었거든.
그런데 양키한테 신발 한 켤레를 팔면 명동의 사장한테 결산을 하고도 자동으로 내 주머니에 따로 들어오는 돈이 거금 일만 오천 원이 된다는 걸 나중에 알았던 거야.
시장에 가면 통닭 한 마리 값이 300원이고, 자장면 곱빼기가 150원이던 그 때, 느닷없이 난 세상 최고 부자가 된 거지.
근사하게 치장한 동네 다방은 내 사랑방이었는데, 미 공군기지인 K-55 정문 앞에 있는 미국 잡지 가게에서 빳빳한 베이스볼 매거진을 사 들고 와서는 구석 자리에서 읽기를 좋아했어.
사실을 말한다면 읽는 다기 보다는 그냥 그림들을 보는 거지. 미군 손님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도 모르게 ‘휘프티 화이브’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도 미군기지 이름이 K-55였기 때문인데, 사실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어가 얼마나 변변했겠어.
하지만 젊은 마담, 그러니까 너무도 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묘한 향기가 늘 가슴을 먹먹하게 하던 그 여자는 내 웃기는 영어실력에 대해 눈치를 채지 못했을 거야.
마담이 보자기에 싼 커피포트 쟁반을 들고 가게 앞을 지날 때면 난 늘 미군 손님에게 여유롭게 웃으면서 과장된 제스추어를 취하곤 했거든.
더구나 거금 120원이던 쌍화차를 시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드시죠.”라고 말할 수 있는 스무 살은 세상에 나 밖에 없었을 테니까.
마담은 답례로 쌍화차에 계란 노른자를 두 개 띄워 와서 미소 짓곤 했지.
마담은 담배를 피워 물며 버릇처럼 말했어.
“서울엔 언제 올라가요?”
그러면 나는 말하지.
“서울 형들이 그랬어요. 마담이 싫어지면 언제든 올라오라고.”
어설픈 농담에도 당시 아무리 우호적인 눈을 가진 내가 봐도 최소한 열 살은 더 먹었을 마담 얼굴에 홍조가 끼는 걸 나는 못 본 채 할 수 밖에 없었어.
심장 속에서 불어대는 스무 살의 폭풍을 어떻게든 억제해야 했으니까.
시장 통닭집 아주머니는 나한테 늘 ‘도련님’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반가워했는데, 그만큼 당시 시골에선 하얀 얼굴이 보기 드물었던 거야.
사실 그 집에서 날 더 반가워하던 사람은 내가 항상 내미는 일불짜리 빳빳한 돈을 굳이 자기가 받으면서 거스름돈을 찾느라 돈 통을 헤집던 그 집 딸이었어.
내가 통닭을 사러 가는 날이 토요일이라는 걸 그 아이는 어떻게 알았는지, 교복을 얼른 벗어던지고 엷은 화장까지 하고 기다렸을 정도니까.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서울에서 몰려오는 내 친구들이 그 가엾은 여고생을 보겠다며 시장을 괜스레 어슬렁거리기도 했지.
언어소통의 부재와 꿈결에 치미는 잠재적 의식들이 그렇게 융화되어 가던 그런 시절이었으니, 생각해봐.
야구공과 글러브를 챙겨 그런 환한 아침을 맞으러 갔던 그 ‘파라다이스’ 공원이 내 눈에 어떻게 비춰졌겠어.
눈앞에 흔들리는 아름다운 미소와 심장의 포효 속에서 살아가던 그 시절, 먼 나라 이야기였던 자유와 평등 박애 같은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
아직도 나는 이상적 현실구현이 정반합에서 오는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단계에 있다고 떠들어대는 그런 말을 믿지 않는데, 실제로 그런 일들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이젠 그들도 믿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존재의 양 끝을 점령하는 인과적 해석은 목적론적 해석과도 양립하는 물리적 사건이라는 건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 그러면서 느끼는 거야.
그 말은 거짓말이라는 걸.
말을 지어내는 모든 이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악한 욕심에서 출발한다는 걸 우리가 인정한다면 세상에 녹록한 건 하나도 없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먼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마도 내게 아직도 남았지만 이젠 꺼져가는 가슴 깊은 내재적 불빛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당신이라는 걸 믿기 때문이겠지.
내 말만 듣고 그 황폐한 곳을 꿈의 정원으로 상상했던, 어리석은 당신 말이야.
아직도 내겐 스물일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