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난 80살 정도까지 살지 않을까?’ 하는 근거라고는 전혀 없는 기대수명의 정확히 절반이 된 2021년 즈음, 판단이 쉽게 흐려져 현혹되지 않게 된다는 불혹의 나이가 됐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40의 나이가 되면 자연스레 불혹이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광고 전단, 길거리에서 진행하는 판촉 마케팅, 1+@로 판매하는 상품, 인스타/블로그/포털 곳곳에 노출되는 광고들을 봐도 기웃거리거나 현혹돼 구입하는 빈도가 확실히 줄게 됐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닐 수 있지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의 현혹으로 크롬브라우저 상단은 항상 새로 열린 인터넷 탭으로 가득 차있고, 각종 쇼핑몰 장바구니엔 필요도 없는 물건들로 한가득, 개중엔 구입까지 이뤄졌지만 정작 사용하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처박힌 물건들을 생각해 보면 불혹을 맞이해 변해가는 나의 모습을 가장 좋아한 사람은 와이프였을 테다.
아마도 현혹되는 과정과 횟수가 정성평가가 아니라 정량평가로 수치화 돼 스코어 보드에 새겨진다면, 마치 9회 말 2 아웃 풀카운트에서 끝내기 홈런으로 역전한 야구게임을 직관한 것처럼 열광했을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꼬임엔 넘어가지 않게 된 불혹의 시점에 새로운, 커다란 꼬임이 생겼는데, 바로 ‘육아휴직’이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육아휴직 사용은, 특히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은 금기시 돼있는 시기였고, 근무하는 업계 특성상 극단적인 남초 회사에 재직 중인 필자의 회사는 흡사 군대의 그것과 비슷한 조직문화로, 본인 연차마저 철저히 눈치 받는 회사였기에 육아휴직 사용은 사실상 먼 나라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왕복 4시간 이상의 출퇴근 시간으로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주말 외엔 거의 없다 보니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13년의 사회생활에 지친 심신을 한 번쯤 재충전하고 싶다는 욕구, 혹시라도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육아휴직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와이프에게 결재받아야 실행에 옮길 텐데, 막연히 쉬고 싶다고 말하기엔 철없는 투정으로 보일 테고, 그렇다고 내가 무작정 쉬기만 할 성격도 아닌지라 몇 날며칠을 고민하다가 조심히 털어놨다. 다행히 와이프가 처음엔 좀 놀랜 눈치였지만, 그렇게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겠냐고, 이번 기회에 함께 시간도 보내고, 재충전은 물론 자기개발을 해보자며 응원해 줬다.
아마 육아휴직 기간 동안의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허송세월을 보내게 될 것 같으면 나 스스로 포기할 것을 알고 믿고 맡긴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