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더 배우는 시간/
1. 서론 : 문래동의 장소성과 작업의 시작
2019년 12월, sAn 싱글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학업을 매듭짓기 위해 학교로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수료를 한 이 시점을 자축하고 싶어 새로운 곡 작업을 하기로 했다. 다시 시작한 환경공부는 도시와 자연, 공간과 경관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을 선사해 주었다. 환경문제를 바라보던 나의 관점에도 다양한 변화가 생겼고, 공간과 자연을 음악으로 다루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대학원생과 뮤지션, 환경활동가를 오가는 철새 같은 라이프 스타일은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는 곧 해당 프로젝트를 실행하기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영등포 문화재단은 사라지는 문래동의 모습들을 아카이브하고 있었다. 이에 TUNE 은 문래동의 장소성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요청받았다. 철공소들이 즐비했던 산업공간들이 하나 둘 사라지며 문래동은 변화했다. 카페와 펍, 식당이 산업유산과 만나 독특한 운치를 제공해 주었고 빠른 시간에 새로운 형태의 문화거리로 변모했다. 또한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 입주는 창의적인 창작물들을 생산해 냈다. 문래동의 사례는 낙후된 도시를 바라보는 기존 우리의 시각에 신선한 영감을 주었고 점차 서울뿐만이 아닌 다양한 도시, 오래된 공간들이 문래동의 사례를 적용했다.
2. 곡 작업 : 장소의 기억을 음악으로
문래동에 작업공간을 둔 미술가, 건축가 등 지인들의 장소를 수차례 방문하며 영감을 떠올렸다. 낡은 지붕과 창틀, 긴 세월에 여러 번 쓰임이 변모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가사로 녹였다. 한때 번창했던 장소의 기억을 시적으로 은유했다. 사운드에 대한 고민은 한동안 빠져 있던 Jose Gonzales의 음악과 당시 막 컴백한 Kings of Convenience, 평소 즐겨 듣던 아이슬란드 뮤지션 Asgeir의 음악이 큰 도움을 주었다. 각 뮤지션의 스터디는 기존 노리플라이와 TUNE이 지향했던 드라마틱하고 웅장한 사운드를 보다 담백하게 표현하게 해줬으며,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담을 '문래동' 과도 어울릴 것 같았다. 이에 습관처럼 사용했던 악기들에 변화를 주었는데, 가장 큰 변화는 퍼커션을 메인으로 두는 리듬이다.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카혼과 여러 어쿠스틱 퍼커션 악기들을 구매하게 되었고, 어지간하면 간편하게 미디로 녹음했던 기존의 방식에서 한 땀 한 땀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소리를 녹음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디지털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의 회귀는 다양한 음악적 영감을 주었고 이는 '문래동' 작업전체에 있어 큰 가르침을 주었다.
3. 악기 연주 : 약은 약사에게, 악기 연주는 연주자에게
제작비 등의 현실적인 문제로 모든 연주를 직접 하려고 했었다. 안타깝게도 근 20년 간의 음악활동으로 커져버린 '퀄리티에 대한 미련'으로 결국은 전문 연주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약은 약사에게..' 라는 명언처럼 그들은 내가 3일 밤낮을 녹음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포기했던 연주들을 단 한시간만에 연주해 주었다. 코로나의 여파인지 혼자가 익숙해진 바람에 그만 과오를 범할 뻔했다. 이럴 때면 늘 함께 음악을 만들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던 동료가 그립기 마련이다.
베이스 녹음중인 권혁호.
4. 보컬 레코딩 : 솔루션스 보컬 박솔의 보컬 솔루션
훌륭한 연주자들 덕분에 녹음 과정은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했고 점차 세상으로 나갈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늘 문제였던 보컬 레코딩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이는 오랜 친구이자 음악 동료인 솔루션스의 박솔이 해결해 주었다. 가이드 형태로 녹음된 나의 보컬을 듣고 박솔은 여러 방향에서 조언을 해 주었고 가이드 보컬도 직접 새롭게 녹음해 보내주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홀로 고민했던 시간들이 무색해질 만큼 명쾌한 프로 보컬리스트의 솔루션이었다.
5. 믹싱&마스터링 : 어느덧 장인이 된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나잠수
레코딩과 여러 디테일한 곡 작업 과정이 끝나면 늘 믹싱과 마스터링을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고민이 찾아온다. 물론 지금까지의 노리플라이와 TUNE 후반작업에 참여해 주신 훌륭한 엔지니어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TUNE의 작업은 늘 새로운 도전 마냥,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고 즐겁게 만들어 준다. 우연히, 아주 오랜만에 발매한 솔루션스 나루의 솔로 앨범을 접하게 되었다. 기존 솔루션스의 일렉트릭 사운드가 아닌 매우 담백하지만 세련된 어쿠스틱 앨범이었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앞으로 발매할 '문래동' 과 흡사한 방향성을 지녔다. 우리는 전문 싱어송라이터로 세상에 나올 때 함께 시간을 보냈던 소중한 관계지만 각자의 팀을 꾸리고 표류하며 어느 순간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되어있었다. 덕분에 반가운 마음으로 나루에게 연락했다. 놀랍게도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나잠수가 그의 이번 앨범 믹싱과 마스터링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미 이 분야에서 훌륭한 입지로 자리잡은 엔지니어로 활약하고 있었다. 어느덧 중견 가수가 된 세 명의 동갑내기 뮤지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 인디씬에서 매우 역사적인 장소로 통용되는 붕가붕가 레코드 스튜디오는 나잠수의 말처럼 세월의 에이징(오랜 시간 음압을 통해서 공간이 자연스럽게 본연의 사운드를 찾아가는 것)이 되어있었다. 이에 훌륭한 장비들과 나잠수의 센스가 곡에 날개를 장착해 주었다.
MIX 작업 중인 나잠수와 TUNE (feat.나루)
6. 앨범 자켓 촬영 : '나름' 사진작가로의 셀프 데뷔
모든 음악 작업을 마치고 앨범 자켓 촬영 차 문래동을 다시 찾았다. 무거운 DSLR과 렌즈들을 들고 대략 하루를 꼬박 걸으며 문래동을 촬영했다. 물론 다년간의 하이킹 경험으로 하루 30키로 정도는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지만, 좋은 장면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해당 프로젝트에서 총 감독을 담당하고 있는 엄아롱 작가는 수년간 문래동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담을 적절한 장소를 소개해 주었다. 낡은 지붕들이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오는 옥상, 매우 올드하지만 운치를 지닌 골목, 철공소들이 즐비한 거친 산업 현장 등 모두 문래동의 상징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로 뛰며 얻은 1000여장의 사진 가운데 앨범커버로 적절해 보이는 사진을 추렸다.
앨범 자켓으로 쓰일 사진을 촬영중인 TUNE.
완성된 최종 아트워크.
이번 '문래동' 작업은 또 다른 경험과 배움을 제공해 줬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나 현실적인 문제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지 못한 것인데, 이는 추후 라이브 클립 등으로 달래려 한다. 끝으로 해당 곡 작업 전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해당 글은 지니뮤직 '튠 (TUNE), 싱글 [문래동] 작업기와 아티스트 인터뷰' 를 바탕으로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