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by SM

어제 회사 동료 모친상으로 아산병원을 다녀왔다.

지난 겨울부터 장례부고가 많다. 대부분은 부모상이다. 나와 주변 지인들 나이가 50쯤 되고 그들 부모님 연세가 여든이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노환으로 많이 돌아가시는 듯 하다.


고인의 연세가 여든 아흔 넘어가니 장례는 평온하다. 지병이 있었던 분들도 많고 꼭 그렇지 않아도 최근 몇 달 정도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증세가 있어서 그런지 갑작스런 죽음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그냥 하나의 절차와 예식을 진행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예전 장례식장 풍경은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뜨문뜨문 있던 일이기는 했으나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장례 풍경은 이랬다.


문 앞에 상가집을 알리기 위해 근조라고 써진 등이 켜져 있었고 마당에 학교 운동회때 쓰는 천막을 쳐놓고 음식상을 마련해 두었다. 심지어 아파트 1층에 그런 천막을 쳐놓고 장례를 치르던 집들도 더러 있었다.


상주는 삼베 상복을 입고 망건쓰고 지팡이 짚고 문상객을 맞았다. 두 번 씩 재배를 마친 문상객에 인사하면서 "아이고 아이고" 곡을 했다. 그리고 이틀밤을 꼬박새고 발인하고 상여가 나갔다. 상여가 나가는 동안 상여가를 불렀고 가는 중간 중간 상여꾼들과 노잣돈 때문에 실갱이를 하면서 장지에 가서 매장을 했다. 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옛날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병원이나 상설 장례식장이라 해도 십수년전 장례식장은 훨씬 진중하고 엄숙하게 기억된다.

간단히 문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당시간 자리를 지키면서 상주를 위로 했다. 술을 마시거나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내면서 상주 곁을 지켰다. 중간 중간 상주를 위로 했고 오는 손님들도 같이 맞이했다. 당시에 어느 집에 문상을 간다는 것은 최소한 저녁 한 나절, 심지어는 밤을 새는 것을 각오(?)하는 꽤 긴 이벤트였다. 그래서 코미디나 드라마에서 밤새 놀고 온 남편의 대표적 변명은 '상가집'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어찌 보면 너무나 간소화되었다. 당연히 밤을 새는 장례식장은 더 이상 없다.

전해 듣기로 한 20년 전 세브란스 장례식장이 밤 12시에 문을 닫는 정책을 시행했다고 한다. 시행 당시에는 상주들의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전통적 장례문화에 대한 도전처럼 받아들여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모든 장례식장이 그걸 받아들였고 지금은 밤샘하는 장례식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밤을 새며 술을 먹거나 도박을 하다가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상주들의 건강과 컨디션 유지를 위한 것이고 이것이 결국은 상주들에게도 호응을 얻었으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요즘은 부산에서 서울까지도 서너시간이면 올 수 있는 정도 교통이 발달하니 굳이 밤늦게 찾아올 손님도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오래 머무르지도 않고 바로 인사만 하고 자리를 뜨거나 동행자가 있다면 식사 한끼하는 정도이다. 아주 친분이 있지 않은 한 앉아서 술을 먹는 일도 드문 일이다. 바닥에 퍼질러 앉지 않고 식탁과 의자에 앉다 보니 오랜 시간 앉아 있기도 쉽지 않다. 당연히 그런 공간에서 고스톱을 치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다.

음식을 준비하거나 대접하는 것도 장례식장에서 알아서 다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지인이나 가족을 동원할 필요도 없어졌다.


잠깐 중간에 다른 얘기를 하자면 1999년 쯤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회사 사장님 부친상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히 회사 지원 부서 직원들이 총 동원 되었다. 지원부서 여직원들을 동원해서 아침 저녁 조를 짜서 식당에서 서빙을 하게 했고 재경팀 직원들은 부조금을 관리했고 총무팀 직원들은 장례용품, 장지 확보 등을 담당했고 인사팀 직원들은 손님 명단 관리 등 마치 회사일 처럼 업무분장을 해서 장례를 치뤘다.


당시 내 임무는 화환의 '리본' 관리였다. 엄청나게 밀려들어오는 화환을 장례식장앞에 모두 세워 놓을 수 없으니 대략 10여개 화환만 세워놓고 나머지는 리본만 떼다가 한 쪽에 걸어놓는 것이 내가 담당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은 그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VIP손님이 오면 그 회사 혹은 기관에서 보낸 화환의 리본을 빨리 찾아서 눈에 잘 띄는 장례식장 앞 화환에 걸어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조흥은행장'이 문상 온다는 연락을 받게 되면 나는 빠르게 수많은 리본 중에 '조흥은행장' 리본을 찾아야하고 조흥은행장이 도착하여 문상하기 전에 진열된 화환에 그 리본을 걸어서 혹시 그 '조흥은행장'이 내가 보낸 화환이 잘 도착했나 둘러봤을 때 딱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의 하이라이트인 셈이다.


개인 가족 장례에 회사 직원을 동원하는 것이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때는 당연하게 생각했고 혹시 실수라도 할까봐 엄청 조바심을 내고 마음 졸였던 아스라한 기억이 난다.


다시 간소화된 장례절차로 돌아가면 최근 들어 꽤 자주 '절' 하지 말라는 안내를 보게 된다. 기독교식 장례가 아닌데도 절을 별로 권장하지 않는 분위기 인 것 같다. 꽃을 얹거나 향을 피우고 목례로 절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는 절을 하려고 고개 숙여 내려가다가 영정 사진 아래 제단 밑에 '절 하지 말고 고개 숙여 예를 표해주세요'라고 써진 문구를 발견하고 엉거주춤 다시 일어났던 우스꽝스러운 기억도 있다.

추측하건데 상주들이 모든 문상객을 대상으로 절을 하면 너무 물리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차츰차츰 절을 하지 않는 쪽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대부분 화장으로 바뀌어 상여가 나가거나 매장하는 절차도 없어졌다.


이 모든 간소화가 어찌 보면 불합리한 허례허식이 점차 없어지는 과정이고 더 실리적이고 편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환영받을 만 하고 당연하게 여겨진다.


다만 예전 누군가 말하기를 "상주들이 사흘 내내 곡을 하면서 지팡이에 겨우 몸을 기대어 기절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은 부모님 잃은 죄인으로 부모님을 상실하는 아픔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며칠이라도 밖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라 했다. 조선시대때 처럼 3년 상은 못해도 단 며칠이라도 물리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부모님을 보낸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너무 빠르고 간단해진 장례절차가 무조건 100%로 옳은 일인지는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는 키오스크로 부조금내고 영상 찍어 문상하고 상주들은 3D 가상으로 손님을 맞고 실질적인 절차는 업체에서 모듈화되고 프로그램화된 형태로 처리하는 초스피드 초간단의 장례가 현실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보다는 좀 더 가족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장례절차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단 며칠이라도.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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