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홀릭

by SM

중독이란 특정 행동이나 물질에 집착하고 의존하여 정상적인 생활에 장애가 생기는 상태를 뜻한다.

그 대상은 매우 다양하다. 알코올, 약물, 담배, 카페인 같은 물질뿐 아니라 게임, 쇼핑, 도박 같은 행위, 심지어 어떤 사상이나 종교와 같은 정신적인 영역도 포함된다.


중독이 생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행동이나 물질을 접했을 때 순간적이지만 강렬한 쾌감과 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정 기간 그것을 하지 못하면 금단현상이 나타나며, 불쾌감·우울감·불안감이 밀려온다.


서양에는 ‘초코홀릭(Chocoholic)’이라는 표현이 있다.

말 그대로 초콜릿에 중독되어 일정 주기로 섭취하지 않으면 불안감이나 불면증 같은 금단 증상이 생기는 현상을 뜻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초코홀릭’이 유년기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서양의 부모들이 자녀들이 어떤 일을 잘 해내거나 착한 일을 했을 때 '상(Reward)'의 일환으로 '초콜릿'을 주었는데 이 때 느꼈던 쾌감이 지속적으로 연장되어 성장한 이후에도 '초콜릿'을 먹을 때 그 때의 그 '우쭐한 느낌, 편안한 느낌, 행복감'을 상기하면서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서양도 60-70년대 얘기지 지금은 더 이상 이 말이 유효하지 않을 것 같긴하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국밥'을 소울푸드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나에게 소울푸드, 혹은 서양 아이들의 '초콜릿'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짜장면'이다.


내 또래들에게 어린 시절 '짜장면'은 특별한 음식이었다. 오랜만에 가족 외식을 하거나, 친구들을 초대한 생일날, 졸업식 같은 날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물론 "우리집은 외식할 때 갈비먹고 뷔페먹었는데"라고 이야기할 부잣집 친구들도 있겠지만 대충 우리집 정도 일반적인 살림의 집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어릴 적 나에게 '짜장면'은 서양아이들의 '초콜릿' 처럼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 행복한 느낌, 흐뭇한 기분'을 떠올리게해주는 음식이라 수시로 찾게 되고 일정 기간 먹지 않으면 '짜장'의 고소한 향기가 머리속을 맴도는 착후현상(이런 말이 있나? ㅋㅋ)을 금단증상을 보여주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증상은 짜장면을 먹는 순간 사라지고 다시 그 옛날느낀 쾌감과 행복감을 누리게 된다.


결국 나는 오랫동안 '짜장홀릭'에 빠진 것이다.


내가 '짜장홀릭'이 된 것은 단순히 어린시절의 향수 때문은 아니다.

첫째 짜장면은 가격이 저렴하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60-70년대에 화교들의 경제적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짜장면'을 물가지수 품목에 포함하여 함부로 짜장면 가격을 올리지 못하게 제한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그런 제한이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짜장면은 비싸지 않은 음식이다.


둘째 짜장면은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

음식이 나오면 젓가락을 휙 한바퀴 돌려서 바로 입에 넣을 수 있는 경박한 '짬뽕'과 달리 대략 15초 정도의 '비비는 시간'이 필요하다. 배는 고픈데 비비지 않으면 먹을 수 없으니 어찌 입에 침이 고이지 않을 수 있으랴.

뭐랄까 급히 마시면 체할까봐 선비에게 버들나무잎을 띄운 우물물을 내어준 아낙네의 심정과 같이 '비비는 시간'은 음식을 '식욕'의 본능으로 쑤셔넣는 것이 아니라 차분히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짜장면은 처음에 흑색의 '짜장'과 백색의 '면'의 다소 이질적인 모습이지만 비비고 나면 흑도 백도 아닌 특유의 짙은 갈색으로 대단히 조화로운 비주얼을 보여주고 이는 결국 극강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맛의 절정을 가져다 준다.


안타깝게 동네 중국집은 이미 하향세라고 한다. 배달을 전문으로 하거나 대형 프렌차이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름은 중국집인데 짜장면을 팔지 않는 마라탕, 훠궈집도 그 틈에 들어와있다.

또 이미 너무나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외식음식으로 짜장면, 짬뽕을 대체해버렸다.

이제 짜장면을 뭔가 특별한 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더러는 인생에 가장 어려운 선택이 '짜장'이냐 '짬뽕'이냐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단연 '짜장면'이다.

늘어나는 체중 때문에 탄수화물 줄여야 한다고 하면서 또 엊저녁 퇴근길에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혼자 짜장면에 고추가루 뿌려 흡입하다가 꽤 치유된 줄 알았던 '짜장홀릭'이 떠올랐고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음식이 먹으면 행복해지는 소울푸드가 될까 궁금해졌다.

마라탕이나 피자가 과연 그렇게 될까?


30년 후가 궁금하다.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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