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쓰라린 기억

by SM

몇 대 까지 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집은 장손 집안이다.

우리집이 큰집이니 설,추석 명절 때 우리집에 모여서 차례를 지냈고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뿐 아니라 증조부모 심지어 고조부모까지 우리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단순히 계산해도 설,추석 2번에 6번 제사가 있으니 총 8번의 차례/제사를 지낸 셈이다.


어릴 적 이런 명절 차례와 제사의 기억은 늘 유쾌하지 않았다.


엄마와 숙모, 고모들간의 묘한 신경전이 있었고 신경전을 넘어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더러 있었다. 주제는 한결같았다. 일찍 와서 준비를 거들지 않은 숙모나 준비해 놓은 음식에 대한 타박을 하는 고모에 대한 엄마의 불만이었고 결국 꽤 수차례 싸늘한 분위기로 행사가 끝났고 제각기 헤어진 일들이 반복되었다.


물론 그 불만 저변에는 여자들만 음식 준비와 설거지의 노동에 시달리고 남자들은 술상을 펼쳐 놓고 TV보고 술먹는 불평등이 깊게 자리했을 것이다. 기껏 남자들의 노동은 밤까고 과일 머리치는 정도가 전부였으니 하루 종일 굽고 볶고 다듬고 부쳐내는 여자들의 노동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명절음식도 좋아하지 않았다.

갈비찜 정도 맛있게 먹었을까, 부침개나 나물도 그다지 선호하는 음식이 아니었고 생선이나 통닭도 그 보다 훨씬 맛난 조리법이 있는데 왜 그렇게 해먹는지 알 수 없게 밍밍하고 맛없게 조리되어 젓가락이 쉽게 나가지 않았다.


특히 경상도 출신인 우리집 차례와 제사에는 '돔베기'라는 삭힌 상어고기가 올려졌다. (참고로 '돔베기'는 상어고기를 직사각형 모양으로 토막내어 그렇게 이름불려졌다고 한다. ) 그것도 늘 선산이 있는 군위에서 작은 할아버지가 특별히 날짜 맞춰 장날 장에 가서 제수용으로 마련한 것을 인편으로 보낸 것이니 어찌보면 정성 가득한 귀한 음식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짜기만 하고 꼬릿한 냄새가 나는 그 돔베기가 차례상에 올라오는 것 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돔베기를 넣어 끓인 탕국은 평생 손을 대 본 적이 없을 정도 였다. 그런데 사실 귀한 음식이라 신경써서 챙기기는 했지만 내 기억에 다른 식구 누구도 맛있다고 먹는 것을 본 적이 없고 항상 차례,제사 끝나고 알미늄 호일에 싸져서 냉동실에 뒹굴다가 어느 순간 사라진 것으로 봐서 말 그대로 구색을 갖추기 위한 음식이었을 뿐 먹기 위한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세상 산해진미가 천지인데 왜 늘 그렇게 손만 많이 가고 별로 맛도 없는 음식들만 제사상, 차례상에 오르는지 의문이었고 더불어 늘 불만이었다.



그나마 결혼 전까지는 사실상 제3자의 입장에서 차려진 음식을 먹었고 친척들이 오더라도 잠깐 인사하고 내 방에서 내 할 일을 하면 되었으니 불만이 크지는 않았다. 더러 동년배의 4촌 형제들이 오는 날에는 같이 오락실, 만화방가고 저녁때 폭죽하서 불꽃놀이 몰려다니고 그런 재미도 있어서 목을 빼고 기다릴 정도는 아니지만 명절이나 제사가 부담스럽거나 싫지는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그 차례와 제사의 부담이 자연스럽게 와이프에게 전가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명절과 제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라졌고 도대체 왜 이렇게 아무도 반가워하지도 달가와 하지도 않는 이런 행사를 꾸역꾸역 하는 것일까 뭔가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근본적으로 명절차례와 제사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고 먹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과거의 전통이다. 멀리 떨어진 가족이 연락하기도 만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1년에 한두번이라도 만나자라는 취지가 있을 것이고 먹을 것 없던 시절에 당시에 귀한 음식들을 장만하고 준비해서 나눠 먹자고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시로 연락하고 수시로 만나서 밥먹고 얘기나누는 지금 같은 시대에(심지어 집도 다 가깝다) 그리고 어떡해서든 가사노동을 줄이려고 온갖 가전제품과 배달음식과 외식이 발달한 시대에 명절과 제사는 도저히 시대착오적인 이벤트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집 명절 차례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조상에 대한 예의'라는 거대한 짐을 짊어진 아버지를 설득해서 앞으로 그런 거 하지 맙시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친척들도 같이 참여하는 행사를 내 맘대로 없앨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기간 관망하며 방법을 고민했었다.


그러다 사실상 변화의 시작이 된 시점은 결혼하고 한 4-5년 되었을 무렵이었을 텐데, 각자 자식들이 일가를 이뤄 결혼을 한 작은 아버지, 고모들이 더 이상 명절 차례와 제사에 우리집에 오지 않고 각자 자녀들과 따로 치루겠다고 협의를 하였고 우리 직계 식구들만 행사를 치루면 되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최소한 남들 눈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허락된 것이다.



그때부터 난 명절차례와 제사를 없애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내가 첫번째 시도한 것은 일의 효율화였다. 즉시 행사를 없애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최소한 비효율적인 가사노동을 효과적으로 분담하고 목표를 수립해놓고 빠르게 달성하는 방식의 절차를 개선했다.

내 오랜 관찰 결과 차례상, 제사상을 준비하는 것이 고된 이유는 그 모든 것을 총괄 지휘하는 어머니의 머리속에만 암묵지의 형태로 존재할 뿐이라서 시작은 어딘지 끝은 어딘지 아무도 모르는 데에서 기인했다.


가령 나물을 콩나물, 무나물, 시금치, 고사리를 볶고 무치서 이제 끝났나 보다 하면 어느 샌가 어머니는 뒷 창고에서 말린 호박이나 취나물을 꺼내며 이것도 좀 할까 하고 슬쩍 꺼내놓는다. 혹은 동태전, 동그랑땡, 산적, 빈대떡을 부쳐놓고 이제 끝인가 하면 또 슬쩍 말린 버섯을 꺼내 이것도 좀 올릴까 하고 노동이 추가되었다.


결국 정해진 음식을 빠른 시간에 마련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하루 종일이란 정해진 시간에 되는 만큼 음식을 준비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예측되지 않은 추가 노동은 짜증나고 괴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서 배운 '간판시스템'을 차례와 제사 준비에 도입했다.


식구들이 모두 모이자 마자 어머니를 닥달해서 오늘 어떤 음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혹은 어떤 준비(청소, 정리 등) 목록을 3M 포스트잇에 하나씩 적어 부엌 중간문 창에 한쪽에 쭉 붙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것이 끝나면 더 이상 추가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동그랑땡' -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니라 '동그랑땡 고기다지기', '동그랑땡 두부짜기', '동그랑땡 당근다지기' 등으로 작업을 세부화해서 수십장의 포스트잇에 적어놓았고 그 각각 작업을 모든 식구들에게 나눠서 부여했다. 그리고 각 Task가 완료되면 해당 포스트잇을 반대쪽 창으로 옮겨 붙이는 것으로 해당 작업이 완료되었음을 서로 확인하게 했다.


결과는 실로 놀라왔다. 하루종일해도 모자라던 명절 준비가 모든 식구가 하나씩 포스트잇을 옮겨가며 작업한 결과 반나절만에 다 끝낼수 있었다. 어머니가 부스럭부스럭 뭔가 더 꺼내려는 시도를 하려 했지만 미리 써놓은 것 이상 하지 않겠다는 다짐받은 것을 상기시키며 재빠르게 제압(?)할수 있었고 우린 남은 반나절 같이 영화관에 가서 단체 관람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의 효율화가 몇 년 이어지고 다들 자녀들이 생기고 더 정신없게 된 시점에 나는 두번째 제안을 했다. 모두 맞벌이 하느라 힘든데 명절 음식 준비하지 말고 밥을 사먹되 명절 당일에 아침먹을 식당이 마땅치 않으니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놀랍게도 아무도 조금의 거절의사가 없었고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나는 설 명절 당일 워커힐 호텔 조식뷔페를 예약했고 온 가족이 모여 워커힐 조식 뷔페를 먹고 부모님댁에 가서 차마시고 과일먹고 세배하는 것으로 명절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한 두번 음식 준비하지 않는 것에 재미를 본 이후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몇 차례 호텔 조식 부페를 설, 추석 명절에 갔고 한번은 아예 전날 호텔 방 예약해서 전날 술 먹고 자고 한꺼번에 호텔방에서 세배하고 조식 뷔페 먹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세번째 제안은 명절에 아예 여행을 가자는 제안이었다. 운이 좋게도 설, 추석 명절 몇 번을 웰리힐리 콘도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고 온 식구들이 고기 먹고 백숙먹고 물놀이하고 산책하고 1박2일 보내는 것으로 명절 행사를 대신했다.


이렇게 몇 번 명절 음식 준비를 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집에서 명절 준비는 사라졌다. 최소한 전부치고 나물무치는 명절 음식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각자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부모님댁에 가져가서 밥만 해서 먹는 포트럭 방식으로 명절을 보낸 적도 있고 배달음식을 주문해서 먹은 적도 있다. 또 코로나 때는 각자 식구들이 명절 중 다른 날 따로 부모님을 찾아가서 준비해간 음식 나눠먹는 것으로 명절을 보내기도 했다.


수십년 동안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았고 큰 의미도 느끼지 못했던 명절 차례, 제사가 드디어 완전히 우리집에서는 퇴출된 셈이다.


아주 가끔 큰 전기 후라이팬에 신문지와 달력을 깔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밀가루,계란 무쳐서 전부치던 장면이 그리운 적도 있지만 이내 그것은 과거를 미화하는 왜곡된 기억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우리집처럼 명절차례와 제사를 없애는 게 정답이란 뜻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가족들은 명절 음식 준비를 하고 차례를 지내고 그게 즐겁고 행복한 집들도 많을 것이다.


다만 나는 불평등한 가사노동이 조금 덜했으면 좋겠고 그 절약된 시간이 서로 얘기하고 덕담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즐거운 시간으로 대체되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우린 이번 추석명절도 나물무치고 전을 부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고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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