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이 쓰는 신조어인데 '리즈 시절'이란 말이 있다.
솔직히 나는 그 말을 처음 듣고 당대 최고의 미녀라 불렸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약칭인 '리즈 테일러'에서 그 말이 나왔겠거니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유래는 전혀 뜻밖으로 영국 축구팀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 말을 쓰는 요즘 아이들이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잘 모를 것 같기도 하다.
그 유래야 어쨌건 '리즈시절'이란 전성기 또는 황금기 같은 의미로 쓰여지는 듯 하다.
나에게 '리즈 시절'은 언제 일까?
50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모든 연령대에 제각기 좋았던 시점이 있고 힘들었던 시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많은 책을 읽고 가장 많은 음악을 듣고 가장 많은 논쟁을 하고 가장 많은 시와 편지를 쓰고 가장 많은 술을 먹고 가장 많은 꿈을 꾸고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20대가 아닐까 싶다.
얼마 전 대학 동창들과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음악 얘기를 하게 되었다.
음악에 있어 내 20대 전부를 관통했던 것은 단연 김광석과 동물원 !
그 시절 노래들은 노래말들이 하나같이 짧은 수필이나 시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이라 가사를 곱씹어 가며 들었었다. 당연히 기억력 역시 촉수처럼 섬세하게 살아서 무엇이든 흡수하던 시기라 대부분 노래말을 기억하기도 하였다. 물론 테이프가 늘어질 만큼 LP판이 마모되어 지직거리는 잡음이 날 만큼 듣고 또 들었으니 한 음반의 모든 노래를 외우는 것 쯤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20대 우리들의 노래를 이야기 하던 중 한 친구가 그 중에 동물원 '백마에서'라는 노래를 언급했다.
사실 '백마에서'는 '혜화동'이나 '시청앞 지하철역에서'와 같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동물원의 노래는 아니다. 동물원 5-1집 음반 맨 마지막에 자리한 노래로 박기영님의 청아하고 맑은 고음이 쓸쓸한 가사와 함께 너무 잘 어울리는 곡으로 어찌보면 숨겨진 보물같은 노래이다.
개인적으로는 군대 제대하고 학교 CC로 여자친구 사귀면서 그 노랫말처럼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백마역에 내려 '화사랑'같은 주점에 다니며 연애하던 시기에 듣고 또 듣고 했던 노래라 가사말 하나하나까지 잊을 수 없는 노래이다.
"흔들거리는 교외선에 몸을 싣고서 백마라는 작은 마을에 내렸지
아무도 없는 작은 주점엔 수많은 촛불들이 우리를 반겼고
너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내 품에 안겨서 그렇게 한 참을 있었지"
"아! 너도 그 노래를 아는구나!"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숨겨진 보물의 진가를 알아봐주고 공감할 수 있는 '동지'를 찾은 것 같은 반가움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대화는 김광석 1집 '너에게'나 역시 박기영님의 노래인 '별빛 가득한 밤에' 같은 노래들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결국 그렇게 추억에 빠진 덕분에 술만 잔뜩 마시고 다음 번 모임에는 '노래방'을 가기로 약속하는 현실적 말로가 되었지만 나의 '리즈 시절' 들었던 음악을 서로 얘기하고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또 더해졌다는 점에서 인생의 새로운 자산이 더해진 것 같다.
어느 시점부터 가요의 노랫말을 모르고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내 기억력이 점차 쇠락하여 예전 만큼 가사를 외우지 못하게 된 탓도 있고 또 테이프나 CD로 노래를 듣던 시절만큼 노래를 차곡차곡 꼼꼼하게 반복해서 듣지 않고 말그대로 stream으로 흘려 듣게 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예전 가사들이 앞뒤 문맥에 맞게 맥락을 갖추어 써진 것에 비해 지금의 가사들은 절반쯤 영어가 섞이고 라임을 맞추기 위해 단순히 단어를 억지로 끼워맞춰서 도무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수 없는 노래들이 대부분이라 'Text'로 가사를 봐도 이해하기 어려워서 외우기는 커녕 따라 읽기도 어려운 노래들이 많아진 원인이 더 커진 것 같다.
이게 뉴진스 'Hype Boy' 의 가사말 일부이다. 어렵다.
Oh baby 예민하대/나 lately 너 없이는 매일 매일이 yeah /재미없어 어쩌지
I just want you/ Call my phone right now/I just wanna hear you're mine
'Cause I know what you like boy/You're my chemical hype boy
내 지난날들은/눈 뜨면 잊는 꿈Hype boy 너만 원해Hype boy 내가 전해
지금 20대들이 내 나이쯤 되었을 때 그들 '리즈시절'에 들은 노래들이 내 추억 속 '백마에서'처럼 회상하게 될 수 있을까?
이런 염려조차 꼰대스러운 거겠지? 그들은 또 그들에 맞는 기억과 추억을 쌓아갈테니까.
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