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것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저녁 무렵,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 안에서 종종 "함 사세요!"하는 외침이 들리곤 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란인가 창밖을 내다 보면, 아파트 앞마당에 젊은 청년들 너댓이 모여있고 그 중 한 둘은 청사초롱을 들고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은 마른 오징어를 얼굴에 쓰고, 흰 천에 쌓인 작은 함을 둘러 메고 뭔가 비장한 듯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 한 두 번 수줍은 듯한 작은 외침이 들리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본인들 데시벨만으로는 아파트 단지를 충분히 시끄럽게 수 없다 판단한 영리한 청년들이 슈퍼에서 쭈쭈바를 왕창 사다가 동네 아이들한테 나눠주기 시작했다.
공짜 쭈쭈바를 나눠주고 있다는 소식에 동네 꼬마들은 몰려들어 거대한 대열을 이뤘고 청년의 선창에 맞춰 약 15초 간격으로 "함 사세요!!" 라고 동네가 떠나갈 듯 소리를 질러댔다.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무료함을 느끼던 동네 어른들까지 슬쩍 내려와 뒷짐 지고 서성거리며 '이제 어떤 전개가 펼쳐질 것인지' 멀찌감치 구경에 나섰다. 물론 그 어른들 손에도 쭈쭈바 하나 씩 들려있었다.
오지랖 넓은 어떤 아저씨는 옛날 본인 경험을 공유하며 훈수를 두기도 했다.
이윽고 함을 받아야 하는 신부 집에서 젊은 아가씨나 또래 청년들이 내려와서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마른 오징어 쓴 함진아비는 드러눕기도 하고, 돈봉투를 밟아야 움직인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신부 친구들로 추정되는 젊은 아가씨들이 음식을 먹여 주기도 하고 술을 따뤄 주기도 하면서 어르고 달래 대열을 한 걸음씩 움직이게 했다.
이런 유화책이 여의치 않을 때는 신부 오빠나 남동생으로 추정되는 청년들이 나서 일행 중 약해 보이는 한 둘을 타겟으로 가벼운 몸싸움을 벌여 잡아 끌어 당기기도 했다.
시간이 제법 흘러 동네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떠날 때가 되면 청년들 대열은 못 이기는 채 함을 짊어지고 신부 집으로 들어섰고 현관문 앞에서 박을 발로 깨고, 신부 집 마루에 마련된 함 놓는 자리에 함을 내려 놓으면서 마침내 하루 저녁 동네 소란스런 '행사'는 끝이 났다.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면 수많은 주민들의 평온한 저녁 일상을 깨는 이런 소란과 소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였다는 것도 놀랍고 또 한편 그걸 용인해주면서 자기집 행사처럼 웃고 즐거워하고 축하해줬던 것도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유대감이나 공동체의식(?)이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짐작하겠지만 이런 소란과 소동은 점차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문화로 바뀌면서 거센 민원과 반대를 직면할 수 밖에 없었고 오래지 않아 아예 아파트 내에서 그런 행위를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옛날과 다른 주거형태나 이웃관계 등 변화를 거쳐 자연스럽게 함을 파는 이 행사는 사라졌다.
내 기억에 최근 20년간은 한번도 함을 지고가는 일행을 본 적도 없고 그런 이벤트를 했다는 얘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이 문화는 적어도 도시에서는 완전히 퇴출되고 소멸된 것 같다.
사실 나는 처가집이 부산이었기 때문에 그 이벤트를 시도조차 할 수 없어서 조용히 내가 작은 트렁크를 하나 들고 가서 처가집에 내려놓는 것으로 함을 주고 받는 의례는 갈음했다.
내가 직접 '함 사세요!' 대열에 직접 동참했던 것은 친구 정수 결혼할 때가 유일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이던 그때 이미 동네 시끄럽게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친구들 모두 숫기도 없어서 우리는 강짜 한번 부리지 못하고 쭈뼛쭈뼛거리다 신부집으로 딸려 들어갔다.
들어가서 점잖고 조용하게 한 두잔 술을 얻어먹고는 이미 협상된 봉투를 들고 나와 술집으로 멋적게 향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찾아보니 결혼 전 '함'을 보내는 것은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양가가 혼인을 서약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전화,문자,카톡,SNS를 통해 사실상 전세계 실시간 communication이 가능한 지금 시점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절차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사라져 가는 이 문화에서 굳이 의미를 찾자면 두 젊은 남녀의 혼인을 직접적 가족이 아닌 동네 사람들에게 떠들석하게 알리면서 더 견고하고 단단한 결혼생활을 다짐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싶기는 하다.
30-40여년 전 우리 아파트 앞에서 소란을 피웠던 그 형님들 결혼생활은 지금까지 평온하고 순탄하시겠지?
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