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우리집의 중심은 고2 쌍둥이들이다.
가족의 일정은 모두 그들의 학교, 학원, 공부 스케쥴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들의 심기가 어떤 지에 따라 그 날 하루 우리집 분위기가 결정된다.
딸내미가 아침에 뜬금없이 기분 좋아 콧노래를 부르는 날은 가족 모두 긍정/행복 모드이고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뾰루퉁한 날은 가족 모두 서로 눈치보고 조심해야 하는 날이다.
외식 메뉴를 정하는 일도, 어디 나들이를 가는 일도 모두 그들의 입맛과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
사실상 우리 부부의 삶의 절반 쯤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키우고 가르치는 일에 쓰고 있다. 그나마 회사 생활하는 나는 그 비율이 적지만 와이프는 절반 이상의 시간을 아이들을 위해 쓰고 있다.
아이들이 없는 우리 삶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다.
26년전 결혼할 당시에 우리 부부는 '결심'까지는 아니었지만 '굳이'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 그 이유 역시 우리들의 부모를 보니 그들의 삶은 별로 없고 아이들에게 얽매여서 당신들 원하는 것 하지 못해서 당신들 삶이 뭐랄까 "좀 초라해졌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때 까지만 해도 우리 둘만의 삶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를 낳지 말고 우리 만의 행복을 위해 살자고 서로 암묵적인 동의를 했고 그 '다짐(?)'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 기간 동안 우리 부부는 세계일주 여행도 다녀왔고 공부 더 해보겠다고 대학원도 다녔고 각자 회사 생활에서도 인정받고 성과를 내고 성장할 수 있었다. 모두 각자의 삶에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쏟고 바쁘게 살아갔다.
그렇게 결혼하고 대략 7년쯤 지난 2005년 경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우리는 스스로 우리 부부관계가 심각한 위기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위에 말한 것 처럼 각자의 삶에 몰두해서 치열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고 있었으나 어느 덧 서로에 대한 존재나 서로를 위한 관계는 점차 각자의 삶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각자 따로따로 바쁜 삶을 살고 각자 관심사도 달라지니 서로 대화도 없어지고 가끔 하게 되는 대화도 각자 다른 얘기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소통은 줄어들고 이야기는 엇나가고 충돌이 생기고 싸움으로 이어졌다. 말을 할 때 마다 싸우게 되니 그럴 수록 더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같은 집에 사는 다른 2사람이라 집을 운영하는 항목 (양가집안일, 청소,빨래,설거지,식사 등)에 대한 철저한 역할분담과 업무분장이 있을 뿐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부부'로써 '미래'같은 것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도 한번 더 충돌이 있었다면 당장 이혼서류들고 가정법원으로 달려갔다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관계였다.
이런 충돌과 갈등을 겪으면서 긴 논의 끝에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한 것도 서로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아이를 가지기로 한 것도 역시 서로를 위한 결정이었다.
우리가 부부로 계속 연을 맺고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고리는 어쩌면 그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아이가 금방 생기지 않았다.
그냥 생기겠지 하면서 한 해가 훌쩍 지났다.
결국 우리는 불임전문 산부인과를 찾았다.
다행이 양쪽 모두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한 단계씩 치료를 해나가기로 했다.
처음 몇 달은 불임병원에서 지정한 날에 자연임신을 시도 했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자 그 뒤에는 배란 유도제를 맞는 단계로 넘어갔다.
사실 이런 불임치료는 전적으로 여자의 몫이고 부담이다. 설마담은 매일 스스로 배란유도제를 자기 몸에 주사해야 했고 여러 부작용에 시달렸다.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여러 개 난자를 생성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뭔가 호르몬을 조작하는 것일테니 몸에 좋을리 없을 것이다.
당시 해외 마케팅팀 과장이었던 설마담 입장에서는 엄청난 중압감의 회사 업무 위에 또 다른 큰 Task가 부여되어 짓눌린 상태가 된 셈이었다.
배란유도제를 맞는 것으로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이 과정이 괴로운 것은 스스로 주사를 놓고 부작용에 시달리는 것도 있지만 매달 이번달은 성공하려나 기대했다가 또 좌절하고 또 기대했다가 좌절하게 되는 심리적 상실감이 더 큰 괴로움이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이제 인공수정 단계로 넘어가자고 했다.
사실 배란유도제 맞는 과정도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 운명에 아이는 없는 건가 하고 그냥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어차피 아이없이 살기로 했으니 달라진 것은 없다하고 포기할까 싶었다.
그래도 인공수정까지는 그나마 견딜만한 과정이라는 조언에 따라 마지막 시도는 해보자하고 결정했다. 다만 그 다음 단계인 체외수정이나 시험관 까지는 넘어가지 않기로 협의해놓고 인공수정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인공수정을 한 두 번 시도하던 2007년 가을 쯤 인공수정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병원을 찾았고 실로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임신 확률을 높이기 위해 과배란하는 데 그 중에 3개가 수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난 바보같이 설명해주시는 의사 선생님께 "그게 무슨 뜻인가요?"하고 물었다.
의사선생님은 "혹시 종교가 있느냐?"고 우리에게 먼저 물었다.
"독실하지는 않고 천주교...라고도 할 수 있긴 한데…" 라고 하자 의사선생님은 약간 낭패인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린 "하지만 성당 안 간지는 몇 년 넘었고 사실상 큰 믿음 없다"라고 답하자
의사선생님은 살짝 안도한 듯 "세쌍둥이가 생겼다는 뜻인데 산모 나이도 있고 셋 모두 건강하게 자라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 하나는 선택유산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하고 제안을 했다.
그다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신념이 있지 않았고 산모의 건강 그리고 둘이라도 더 건강하게 출산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 빠르게 결론 내렸다.
당시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은 불법이었는데 의사선생님이 "성별을 직접 말해 줄 수는 없는데 둘이 다르다"는 엄청난 힌트를 주신 덕분에 성별도 미리 알 수 있었다.
어렵게 임신이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쌍둥이'가 생기다니.그것도 "아들 딸 쌍둥이라니!!"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뭔가 내 인생이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출산하는 데까지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쌍둥이를 임신한 거대한 배를 가지고 설마담은 회사 출근을 했고 심지어 야근도 꽤 많았었다.
출산을 한 2달 남짓 남긴 때였다.
소위 수축이 심해지는 일이 있어 병원을 찾았는데 우리 담당하는 의사선생님이 "지금 조산 위험이 있으니 당장 회사 휴직하고 입원해라."고 거의 명령을 했다.
설마담이 "그럼 한 두 주만 주세요. 회사 정리할께요."라고 하자 의사선생님은 노발대발했다.
"지금 뭐가 중요하냐? 당신들 아이들이 중요하지 회사가 뭐가 중요하냐? 큰일 난다. 당장 입원해라.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택시나 승용차 말고 엠블런스타고 응급으로 바로 입원해라."고 지시했다.
우리 부부는 사실 그 정도 심각한 상황이라 생각하지 않아 적잖이 당황했다. 둘 다 회사 생활에 진심이던 때라 '아니 그래도 회사업무 인수인계나 마무리는 해야하는 거 아닌가?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부치시는데…'하는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강하게 말씀하신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따를 수 밖에 없었고 입원실이 있는 삼성병원까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엠블런스를 불러 타고 가서 즉시 입원해야 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의사선생님의 야단이 아니었다면 정말 어찌될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고 그렇게 입원하게 된 것 때문에 우리 쌍둥이들이 엄마 뱃속에서 조금 더 자라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6월 출산까지 두 달 꼬박 설마담은 입원해야 했다.
처음에는 며칠 입원했다가 상황 좋아지면 퇴원해서 집에서 지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조산의 위험이 있어서 퇴원시켜 주지 않았다.
수년 동안 역동적으로 회사 업무를 하던 사람이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TV보고 책보고 누워있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큰 고역이었다. 그리고 퇴원할 수도 있을꺼라는 희망이 계속 좌절로 바뀌니 우울감은 극에 다다랐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해줄 것도 없고 나도 바쁘던 시기라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역경을 겪고 2008년 6월 12일 오전 7시43분과 46분에 제왕절개를 통해 쌍둥이들이 태어났고 지금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다.
아침에 한 200번 쯤 이름을 불러야 일어나는 아들과 지각을 불사하고라도 화장을 하고 등교하는 딸내미와 하루에도 몇 번씩 지지고 볶고 싸우지만 그들이 우리 부부에게 가져다 준 의미와 행복은 더 말로 표현할 방법도 필요도 없다.
나는 아이를 낳게 된 후배들에게 "인류가 하는 일 중 가장 위대한 일을 했다"라고 축하해준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인생에 했던 일 중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일은 아이들을 낳고 (내가 낳은 건 아니지만 ㅋ ) 기른 것이란 생각이다.
경제적, 심리적 부담때문에 아이낳고 기르기 어려워져서 출산율이 점점 낮아지고 딩크족, 욜로족, 파이어족이 유행처럼 번진다.
내 경험을 통해서 나는 아이들이 가져다 주는 희열과 행복이 어떤 것이라고 딩크족을 자처하는 혹은 아이 가지는 것을 주저하는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또 꼰대 50대 아저씨의 오지랖과 참견으로 힐난 받을 수 있으니 이렇게 간접적인 글로 남겨본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면 '유자식은 인생의 승자이고 인류의 구원자'라고.
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