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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HR을 하게 되었을까?

by SM

1997년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 중간에 세계일주 한다고 한1년 남짓 빼고 25년 넘게 인사팀에서 일을 했다. 나는 어쩌다 HR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다지 사교적이지도 않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잘 이어가는 편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이런 내가 HR을 사반세기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1997년 5월 쯤 첫 직장에서 부서 배치 면담이란 것을 하면서 직무선택을 한 것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의 기회였고 그 뒤에는 매몰비용이 아까와서 다른 길을 택하지 못해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 직장 SK에서 대졸 신입사원 교육을 5달 가량 받았다. 첫 직장은 종합상사였기 때문에 나는 응당 무역을 하는 부서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부서 배치 면담이 시작되었는데 인사팀에서 이미 나를 점찍어 놓은 상태였다. 그것은 내가 뭘 잘 했다기 보다 대학교 선배 (한명은 심지어 고등학교까지 선배)가 2명이나 있었고 신입사원 교육 받는 동안 술 잘먹고 잘 놀았던 아주 단순한 이유로 부름을 받았다


배치면담에서 내가 받은 유일한 질문은 "현업 부서 말고 지원 부서 중에는 어디 가고 싶냐? "라는 질문이었다. 학교 때 회계나 재무 관련 과목에 흥미가 별로 없던 터라 Finance쪽은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지원 부서 중 나의 선택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그럼…인사팀?" 이렇게 반쯤 반문한 것이 아마 내 응답의 전부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인사팀 선배들은 입사 전형부터 교육 때까지 반년 가까이 같이 지내 워낙 친하게 지낸터라 인사팀도 그리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 몇 년만 일하면 가고 싶은 부서 어디든 보내준다는 달콤한 제안이 더해지면서 내 판단은 인사팀 선배들의 의도대로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 사실 당시에 와이프와는 몰래 썸을 타고 있던 사이였고 교육학을 전공한 와이프는 1차 지망으로 인사팀 내 교육부서를 지원했고 나는 같은 팀에서 일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최종 인사팀 배치에 이르렀다.


90년대 대기업 인사팀은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상당한 인사권을 인사팀에서 직간접적으로 행사했다. 채용, 전배(부서이동)와 같은 것 뿐 아니라 승진, 핵심인력 선발, 주재원 선발, 교육생 선발과 같은 과정에도 인사팀 영향력이 상당했다. 단순한 영향력 수준이 아니라 결정에도 꽤 권한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인사팀은 회사 내 핵심부서로 현업부서에서는 부러워하면서도 경외하던 부서였다.


술집에서 다른 팀 술값을 우리팀 부장님이 계산해주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고 임원들도 연말 인사철이되면 우리팀 부장님의 눈치를 꽤 봤던 그런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그런 권력에 맛에 취했던 것은 아니고 실제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자부심 혹은 내 의견 하나로 회사의 커다란 제도가 새로 만들어지거나 수정되거나 없어지는 그런 큰 효능감을 느끼면서 정말 열정을 가지고 회사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여러가지 이유로 세계일주를 떠났다.


세계일주를 시작할 때는 나는 어쩌면 샐러리맨 직장생활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나는 선뜻 장사를 한다거나 다른 직무를 찾는다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고 결국 소위 '배운 도둑질'로 인사업무를 다시 하게 되었고 거기서 부터는 쉬지 않았으니 20년 넘게 이 일을 계속 한 것이다.


그 뒤에 유일하게 1번 인사팀이 아닌 다른 신사업을 하는 부서에서 사람을 뽑는데 누가 나를 추천해줘서 면접을 본 일 빼고는 인사팀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 동안 쌓아온 인사팀 경력을 포기하고 다른 직무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선택이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사팀으로 끼워진 나의 회사생활 첫 단추가 그리 잘못 끼워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심지어는 언제든 되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첫번째 선택이 30년가까이 경력의 방향을 결정하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알게 된 것이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할 것이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오랜 기간 꾸준히 해온 이 일이 그냥 천직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내가 이 일을 잘하는가 혹은 이 일이 내 역량과 성격과 잘 맞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냥 시작하게 되었고 여전히 하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일 뿐.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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