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키오스크

by SM

세상에 컴퓨터와 키보드가 흔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지금 들으면 의아하겠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에는 타이핑을 배우기 위해 타자 학원을 가기도 했다.


나도 대학 2학년 마치고 군대 가려고 잠시 휴학한 기간 동안 시간도 남고 혹시 써먹을 일이 있을까 싶어서 타자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한 2주 다녔으려나.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당시 한글타자 자격증 준비반이라 2달 코스인데 굳이 자격증은 딸 필요는 없고 어느 정도 타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해서 그만 뒀었다.


수동 타자기는 상당한 물리력으로 눌러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 키보드와 다르게 아주 정확한 운지법 그리고 손모양과 손가락이 중요했는데 2주 정도 그 자세와 자판을 익히는 시간이었고 나머지는 연습의 시간이라 2주만 배우고 더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아무튼 그 잠깐 배운 타자실력 덕분에 군대 자대 배치 받고 행정병으로 군생활을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으니 그 2주가 결코 헛되지는 않은 것 같다.


단지 타이핑을 잘하는 능력이 회사에 와서도 꽤 도움이 되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보니 '1인 1PC'가 도입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타이핑에 익숙하지 않는 상사들도 더러 있었다.


나보다 한 10년쯤 위에 고참들 중에는 A4용지에 수기로 문서를 써서 사무직 여직원에게 전달하면 타이핑을 대신 해주는 방식으로 일해 온 분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타이핑을 잘 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 일손을 덜어주는 똘똘한 부하직원이 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뒤에도 워드나 엑셀, 파워포인트 그리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빠르게 습득하고 다루는 데에도 남보다 빠른 편이라 늘 팀에서 'IT Guy' 또는 'Tech Savvy'로 인식되고 쓰여졌었다.


얼리어답터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신 핸드폰, PDA, 스마트폰, 태블릿 등등 IT기기들을 구입하고 사용하는데 주저함은 없어서 한번도 그런 역량에 대해 고민하거나 뒤쳐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오늘 와이프하고 트레이더스 안에 푸드코드 식당에 들렀다.

음식을 주문하려고 보니 주문대나 주문 받는 종업원이 따로 있지 않았다.


대신 3대의 '키오스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주문을 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또 3줄로 서있었다.

'한 줄 서기를 했으면 좋았으련만… 하나를 골라야 하는구나.'


일단 그나마 제일 짧은 줄에 가서 줄을 섰다.


하필!

3줄 중 내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제일 그리고 유독 느렸다.

옆 줄에 나보다 늦게 줄 선 사람이 다 내 앞에 앞질러 서있다.


조바심이 났다.


화장실이든 공항이든 어디든 한 줄 서기가 아니라서 여러 줄 중 하나를 골라 섰는데 유독 내 줄이 줄어들지 않을 때의 억울함, 괴로움, 질투심, 불안감은 겪어본 사람만 이해할 것이다.


줄서기 선택을 잘못한 나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왜 내가 서있는 이 줄은 이렇게 더딘 것인가하고 문제점의 원인을 찾아보기로 하고 까치발을 들어 멀리 앞에서 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의 면면을 들여다 봤다.


아… 그렇구나...

내가 선 줄에 특이하리 만큼 연세 든 분이 많았다.


어느 정도 줄이 줄어들어 앞 사람이 주문하는 키오스크 화면이 보였다.


"아… 답답하다!!"

이미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장바구니 담기를 누르셔야지요! 지불종류에서 카드 선택을 하셔야죠!! 이제 카드 꽂으셔야지요!!! 번호표 가져가시구요!!!!'


물론 당연히 속으로만 말했을 뿐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1차 주문을 마치고 식사를 하다가 빠뜨린 음료 주문이 있어 다시 줄을 서야했을 때 나는 어느 줄에 가장 젊은 사람들만 서있는지를 훑어 보고 줄을 섰다.

역시 빨리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얘기를 와이프에게 하니 최근 겪은 본인 얘기를 해준다.


"다이소에서 셀프 계산대에서 계산하려고 상품 바코드를 다 찍고 키오스크가 지불화면으로 넘어갔거든.
사려고 했던 뭐 하나를 빠뜨린 게 생각나서 그걸 가서 가져와야하나 아님 그냥 다음에 살까 망설이고 있었어.
그런데 내 뒤에 서있던 젊은 여자가 아니 젊지도 않지 40대는 되어보였으니.
그 여자가 덜컥 내 키오스크 화면에서 '카드지불' 버튼을 누르는 거야.
이건 뭐지 하고 그 여자를 쳐다보니 마치 키오스크 사용이 서툰 당신을 내가 도와줬으니 고맙지?하는 표정으로 빙긋이 웃더라고"

결국 와이프는 너무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고 했다.




사실 매일매일 PC,노트북과 스마트폰으로 일하고 생활하는 우리가 아직 식당이나 마트의 키오스크를 쓰는데 어려움이 있을 만큼 소위 디지털 리터러시 (Digital literacy)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 같은 상황에서 느꼈듯 단지 뒤에서 기다리는 입장이기 때문에 훨씬 답답하고 더디게 느껴질 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보다 훨씬 더 빠르게 새로운 기술이 소개되고 새로운 기기들이 등장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진보와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적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슬프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시점에 나는 1990년대 말 타이핑 잘하고 엑셀,PPT 잘하던 홍대리가 아니라 수기로 쓴 보고서 타이핑을 부탁하는 부장님이 될 것이고 그 때 '키오스크' 혹은 어떤 다른 기술이나 기계가 진격의 거인처럼 나를 덮칠 것이다.


이제 내 숙제는 그 진격의 '키오스크'가 나를 향해 오는 속도를 늦추고 어떻게 반격을 할 것이지 준비하는 것 뿐이다.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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