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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자(영어포기자)

by SM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중학교부터 심지어 대학에 이르기 까지 나의 가장 취약 과목은 영어였다.


나는 중학교 들어가서야 알파벳을 익히기 시작했다. 당시 4줄짜리 펜맨십 노트에 대문자 소문자를 썼던 기억이 있다. (사실 방금 펜맨십이 무슨 뜻인가 사전을 찾아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즉, 굳이 변명하자면 더러 빠른 친구들, 대개는 부잣집 아이들은 벌써 진작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난 이미 출발부터 늦은 셈이다. 중학교 1학년 우리 반에 조성환이란 친구가 다른 친구들은 겨우 소문자 대문자 쓰고 있을 때 인사와 읽기 ㅋㅋ 가 가능한 수준이었고 당시에 '라보'라는 영어 과외를 받아서 엄청나게 자랑하며 으스댔던 것이 여전히 기억나고 난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일이든 못하면 하기 싫은 법이고 그러다 보면 늘지 않고 또 못하게 되고 그러면 또 하기 싫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나에게 있어 영어가 딱 그런 과목이었다.


당연하게도 영어 선생님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 운이 좋지 않게도 좋은 영어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중학교 2,3학년 영어선생님은 원래 영어 전공자가 아닌데 미군에서 영어를 배워 영어선생님을 겸하던 분이었는데 수업에 들어와 잡담하거나 교과서를 줄줄 읽고 밑줄쳤던 기억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런 분이었다. 그 이후 만난 선생님 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유독 영어시간에는 그냥 겉도는 학생이 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영어는 본격적으로 내 발목을 잡았다. 기초가 없으니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흥미가 떨어지는 과목을 붙잡고 시간을 많이 쓴다고 성적이 나오지 않을꺼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노력과 투자한 시간대비 전혀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고3 두번째 모의고사 때인가는 너무 억울하고 답답해서 엉엉 울었던 적도 있을 만큼 내게 영어는 회한의 과목이다.


그런데 정작 학력고사에서 내가 시험 끝나자 마자 합격을 자신하게 했던 과목 역시 영어였다. 1990학년 학력고사는 상대적으로 영어가 쉬웠고 수학이 어려웠던 해였다. 시험 마치고 채점해보니 수학은 어려웠지만 모의고사 수준으로 나왔는데 영어는 생각보다 쉬워서 평소 모의고사 보다 훨씬 (그래봐야 5점 정도?) 나은 점수를 받았다. 나는 어찌 보면 그 덕에 대학에 들어간 셈이다.


대학에 와서도 따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남들이 다 다니는 영어회화 학원도 다녀 본 적이 없다. 그때 나는 어차피 영어가 잘 안되니 차라리 일본어를 해야겠다는 좀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실제 군대에서 일본어 책을 놓고 꽤 공부했던 적도 있다.


시험보는 기술을 터득하여 다행이 어느 정도 토익점수는 받았고 그걸로 취업을 했다.

다만 영어 쓰는 회사에 다닐 줄은 생각 못했다.


세계일주를 마치고 중간에 몇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시 취업을 하게 된 곳이 GE(General Electric)였다. 아마 그 전이었으면 상상하지 못 했을텐데 세계일주 1년 기간은 아주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영어를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어 인터뷰라는 것에 과감하게 도전을 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GE에 입사할 때 영어 인터뷰는 집에서 전화로 진행되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마루 바닥에 예상 질문과 답변을 늘어놓고 소주를 반 컵 마시고 면접을 봤다. 내 기억에 미국 본사의 면접관이 좀 귀찮았던 듯 하다. 준비한 자기소개를 하고 fact체크하는 몇가지 묻고 끝냈던 것 같다. 매출 1%도 안되는 한국에 그것도 Head도 아니고 일개 과장급 인사팀원을 뽑는데 뭐 그리 정성을 들였을까 싶다.


아무튼 그렇게 뭣도 모르고 입사하게 된 외국계 회사 GE에 발디딘 2002년 8월 부터 내 삶은 최소한 영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끊임없는 좌절과 자괴감의 연속이었다.

당시 전화회의를 T-con(Tele conference)이라고 불렀는데 처음 T-con이란 걸 들어갔을때 정말 아무것도 알아 들을 수 없어서 과연 '이걸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듣나?'하는 의구심과 좌절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물론 들리지 않으니 당연히 말하지 못했다. GE에서 영어로 회의 할 때 내 입밖으로 나온 말은 인사말 빼고 통틀어 10마디도 안 될듯하다. 그냥 자리에 앉아있을 뿐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모든 업무는 이메일을 통해 처리했다.


중간에 다시 국내 대기업으로 가려는 시도를 한적도 있지만 외국계 회사에 한번 맛을 보고 발을 들인 이상 수직적이고 형식적인 문화를 가진 대기업으로 다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2002년 8월 이후 GE와 마이크로소프트, 다우케미칼과 지금 다니는 Applied 까지 4개의 외국계회사를 다니며 20여년 인사업무를 하고 있다. 여전히 누가 나를 콕 집어 말하라고 하지 않는 한 회의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고 준비되지 않은 발표나 답변을 하면 손이 떨리고 눈 앞이 새하얗게 되고 외국인과 전화통화때는 남들이 들을까 싶어 톤을 낮추거나 방으로 들어가는 수고를 해야 하는 수준이다.


다만 워낙 오래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들리는 건 훨씬 나아진 것 같긴 하고 무엇보다 눈치가 좀 더 빨라진 듯 하다. 그리고 또 나이가 든 탓에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외국 동료가 적어지고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는 동료가 많아진 것도 그나마 외국계 회사에서 아직도 밥벌이를 하고 있게 된 사정인 셈이다.


가끔 내가 외국계로 들어오지 않고 국내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좀 더 자신감있게 회사생활을 했을까 보다 위축되지 않고 내 목소리를 충분히 내면서 회사생활을 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하는데 그것도 역시 장담할 수 없는 추측일 뿐이란 생각이 들면서 그냥 이런 인생의 아이러니도 잘 받아들이고 감수하고 살아야겠다는 약간의 자조만 하게 된다.


요즘 단어로 치면 영포자(영포자)가 20여년 외국계 그것도 미국계 회사만 20여년 다니면서 집사고 자식낳고 애들키우면서 살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닌가…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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