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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숙이 Sep 17. 2021

한달에 1천원, 5천원씩 모아
55억 자조기금

한국의 커먼즈 <2-2>자활근로자 상조회에서 출발한전국주민협동연합회

월 급여 50만 원의 기초생활수급자 혹은 139만 원의 자활근로자들이 한달에 적금 5000원, 보험료 1000원씩 내서 서로 돕는 기금이 있다. 


그게 씨앗이 되어 2019년 기준으로 55억 원이 모였다. 소설 같지만, 실화다. 전국주민협동연합회(이하 연합회) 이야기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유유미 연합회 상임이사는 "처음부터 55억 원을 모은 게 아니라 10년 한두 푼 모은 게 이 정도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주민협동연합회의 유유미 상임이사


매달 5000원, 1만 원 출자하는 것부터 시작한 상조회가 주민협동회로 발전했다. 전국에 이러한 주민협동회들이 생기자 이들이 모여 2010년 6월 전국주민협동연합회를 설립했다. 


‘스스로를 돕고 나누는 공동체’가 이들의 설립 목표였다. 이를 위해 연합회는 상호부조 사업을 비롯한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다. 


조합원에게 가장 피부에 와닿을 혜택은 신용대출이다. 월 5000원 적금을 내는 것만으로도 신용이 쌓이기 시작한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긴급자금은 500만 원, 의료비는 100만 원까지 대출 받을 수 있다.  


이번엔 ‘천원의 행복’을 좀더 살펴보자. 이 공제상품은 조합원이 매달 1000원을 납부해 운영된다. 납부 소멸성으로 매년 갱신된다. 가입 후 30일 후부터 효력이 발생하는데, 본인 부담 병원비 중 30만 원까지 지원해준다. 


질병뿐 아니라 상해, 상조로도 지원받을 수 있다. 일반 보험사와 비교하면 순수보장형 보험과 지원 항목이 비슷하다. 하지만 월 1000원이라는 소액으로 가입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2019년 6월 기준으로 29개 조합 1020명 가입했다. 2018년엔 66건, 1725만 원을 의료비로 지급했다. 


2019년 12월엔 사회적경제 활동가들을 위한 공제 상품도 출시됐다. 사회적경제 활동가가 가입할 수 있는 의료부조 ‘3000원의 행복’이다.


이 상품엔 마을기업, 협동조합, 자활기업, 사회적기업, 지원조직 등 사회적경제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은 물론, 조직의 추천을 받은 자원봉사자들도 가입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작한 기금이 주변 활동가들까지 안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성장이다. 유 이사는 "더 대단한 건 다른 사회적경제조직에 대출해주는 중앙 조직(연합회) 기금 11억(목적사업출자금 7억포함) 원도 지역 조합의 출자금이란 점”이라고 자랑했다. 


연합회는 기금 55억 원 중 일부인 11억 원을 다른 사회적경제조직에 대출하거나 투자하는 등 운용한다. 2013년 시작한 사회적경제기업 대출사업은 2019년 11월까지 누적 대출금액 총 9억 원을 기록했다. 한 기업당 최대 2000만 원을 대출해주니, 자금이 긴요한 다른 사회적경제기업에 적어도 45건 이상 자금을 융통해준 셈이다. 


연합회는 이밖에 자활협동운동 아카데미를 비롯해 주민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사업, 조합원(회원) 생산품 공동판매 사업도 벌인다.  

<표> 전국주민협동연합회 상호부조금 지원 원칙(자료 : 전국주민협동연합회 ‘천원의 행복’ 9쪽)

유 이사는 우리 선조들이 원래 이런 활동을 했었다고 설명했다. 공제조직은 "향약, 두레, 계의 정신을 전승하는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통점을 보자. 먼저, 공제조직은 향약처럼 스스로 정한 정관에 의해 움직인다. 주거가 필요하면 주거에 대한 돈을 마련하고 사업이 필요하면 사업에 필요한 돈을 마련한다. 또, 계처럼 목표를 정해서 저축한다. 두레처럼 공동노동도 한다.      


“어떤 주민은 겨울 지나면 꽃구경 가자고 꽃구경 계좌를 만들고 어떤 주민은 내년에 해외여행 가자고 계좌를 만듭니다. 어떤 분은 10만 원 생계비 중 매달 1~3만 원씩 곗돈 붓듯 모아 1년 후 어머님 산소를 찾아가기도 해요. 모여서 함께 일도 해요. 서울 외곽에 노는 땅을 분양(무상임대) 받아 공동농장을 운영하고 있고, 밑반찬을 함께 만들어 회원들과 나누는 활동을 해요.”    

 

그는 “자활공제는 마을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살기 어려운 사람들의 작은 금고, 마을 안에 있는 사랑방,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할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자활공제조합(주민협동회)이기 때문이다.


상조회가 주민협동회로, 다시 연합회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부 자활근로자들은 주민지도자로 성장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시골에서 농사 실패한 후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자활공동체에 참여했지만 이후엔 자활기업의 대표자이자 공제조합 이사장이 됐다.


어떤 참여자는 시골에서 농사 빚 지고 도시로 나와 자활근로자로 한푼 두푼 빚을 갚다가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지역의 사회적경제를 책임지는 대표로 거듭 났다. 


또 다른 이는 왕년에 ‘한가닥’했고 말과 행동이 ‘거칠기가 한도 끝도 없었지만’ 주민협동회 이사장을 맡은 후엔 회의를 주재할 정도로 세련된 사회성을 얻게 됐다. 


유 이사는 "기초생활수급자, 초등학교 출신이라 해도 검정고시, 사이버대학을 공부를 더 해서 실무자, 지역자활센터 중간관리자가 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자활 조직이 다른 조직과 다른 점이 있어요. 모든 사람에게서 가질 수 있는 변화와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기에 자활사업은 사람 사업입니다. 이 속에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더로 성장하는 참여자가 흔치는 않다. 지원과 후원을 받는 데에 익숙해진 자활근로자, 기초생활수급자들을 참여주민으로 변화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활근로자가 된 사람들한테는 대개 이유가 있다. 누군가에겐 고치기 힘든 병이 있고, 누군가에겐 가족에게 병이 있다. 누군가에겐 홀로 돌봐야 하는 아이나 노부모가 있다. 


이런 조건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자활근로자로 3년 동안 일하면 일반 직장에 취직하거나 창업해 독립해야 하는데, 자활조직에선 그런 경우를 ‘고용노동부로 간다’고 표현한다. 기초생활수급이나 자활근로는 보건복지부 사업이고, 근로자 취업 지원은 고용노동부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쯤 지나면 '고용노동부'로 못 가고 '복지부'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재창업이 재취업을 하지 못하고 다시 기초생활수급자나 자활근로자가 된다는 뜻이다. 


유 이사는 "일단 지금의 경제여건상 취업 자체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자활기업을 창업하면 살아남기가 어려워요. 자영업 폐업이 OECD국가 중에 1위인 현실에서, 자본도 관계망도 취약한 참여주민이 창업주제가 되는 것이잖아요. 자활기업 1200곳 중 절반은 매출이 안 일어난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체험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무기력이 몸에 밸 수 있다. 지원과 후원을 받는 데에 익숙해진 자활근로자, 기초생활수급자들을 '참여자'로 변화시키는 건 그래서 여전히 어려운 도전과제다. 연합회가 상부상조, 주민지도자 교육을 중시하는 이유다. 유 이사의 말을 더 들어보자. 


“참여자들이 처음부터 주체적이진 않았어요. 국가가 소득을 줄테니 일하라고 해서 온 분들, 노동을 해야 최저생계비를 준다고 해서 온 분들을 주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뭘까 고민했지요. 그러다 나온 게 적립, 저금의 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상조회부터 시작하자는 아이디어입니다." 


전국 각지의 지역자활센터에 기반해 출발했던 상조회들은 2019년 기준으로 38개가 주민협동회로 성장하는 데에 성공했다. 


“예전엔 상조회가 지역자활센터 실무자 중심으로 운영됐다면 지금은 주민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아요. 주민협동회의 경우, 3분의 2정도는 실무나 회계에 대한 점검과 논의가 참여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맡아서 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기관(자활센터)이 아직 돕고 있지만요.”     


연합회와 주민협동회들은 커먼즈Commoms 원칙 중 가장 기본으로 여겨지는 3가지를 전형적으로 잘 보여준다. 먼저, 자산 풀링Pooling. 조합원(회원)들이 출자금으로 기금을 형성해 함께 자산을 만든다. 또, 그 기금의 일부를 연합회로 보내 다른 사회적기업 등 사회적경제조직에 대출해주는 등 사회적 기금도 만든다.     

 

둘째, 민주적 지배구조. 각 주민협동회는 개별적으로 이사를 선출해 이사회를 운영하며 정기총회를 최고의사결정기구를 두고 있다. 어떤 협동회는 협동조합이고, 다른 곳들도 사실상 협동조합 원칙대로 운영된다. 


연합회의 이사회는 각 협동회의 대표자 38인과 연합회 상임이사, 한국지역자활협회장 등 40인으로 구성한다. 연합회의 총회는 각 협동회별로 대의원 5인씩 약 150명으로 진행된다.      


셋째, 수익 배분. 사업에서 나오는 수익은 참여자들한테 배분되거나 조직의 운영비로 쓰인다. 예를 들어, 연합회 목적사업출자’에 1억 원을 출자한 사랑방마을 주민협동회는 매달 35만 원을 이자수익으로 받아 사랑방 운영비로 쓰고 있다. 


사회적경제기업 대출사업을 통해 거둔 이자 수익은 교육 등 공동사업에 쓰인다. 개별 협동회들은 신용부조사업을 통해 회원에게 2% 수준의 이자를 받는데, 이것은 각 협동회별로 운영비 등 용도를 정해 쓰고 있다.      


이들은 언젠가는 자활공제회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유 이사는 "군인공제회처럼 법인을 만들어 현장에서 필요한 공제상품은 바로바로 만들어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 연대를 통해 서로가 서로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급여를 받지 않고서라도 하고 싶은 일입니다.”


유 이사가 언급한 군인공제회는 군인, 군무원 등 회원들을 대상으로 급여 저축, 내집 마련, 복지후생 등 크게 3대 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 퇴직급여의 90%까지 저리 융자해주는 대여사업, 자녀 성년축하금이나 본인 재해위로금 등 무상복지사업, 콘도 등 복지시설 제공사업도 한다. 


군인공제회가 홈페이지에 밝힌 창립배경을 보면, 자활공제회의 필요성과 유사하게 들린다.      


“우리 군의 직업군인은 군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정년이 짧아 장기적인 직업보장이 어려운 취약점이 있습니다. 또한 전역 후 재취업은 현재의 사회적 추세로 보아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직업군인에 대한 생활안정대책이 주요 쟁점화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직업군인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결혼 전에 정년을 맞이해야 하며, 전역 후 유일한 생계수단이 되고 있는 연금액도 현실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에 직업군인들 스스로가 복무기간 중에 전역 후 생활안정을 위한 목돈과 내집 마련 등 자구책 강구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장기적인 직업보장, 퇴직 후 재취업’의 어려움이 있고 ‘생활안정대책’과 ‘자구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어디 군인들뿐이랴. 


그럼에도 한국에선 군인, 경찰, 교직원, 소방, 지방행정, 교정, 과학기술인 등 특별법으로 정한 7개 공제회와 농협, 수협, 신협, 새마을금고 등 개별법에 근거한 금융 조직 등 92개 공제만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자생적인 공제단체로는 지역자활센터의 자활사업 참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주민협동회와 그 전국조직인 전국주민협동연합회, 한국사회적기업중앙협의회 공제사업단이 있으나, 이들 단체의 공제사업을 위한 법 기반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제한이 선택지를 줄인다. 법 기반이 있는 프랑스, 일본, 미국 등지에선 수요자가 공제상품과 보험상품 중 선택해서 가입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수요자들은 민간 영리보험사들의 순수보장형 상품밖엔 선택지가 없다. 이런 상품들은 구조가 복잡해 소비자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가입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한다. 


이향숙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자신의 보고서 ‘한국 사회적경제 공제 실태와 제도개선 방안’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한 사회적경제 조직 형태의 공제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현재 한국의 보험 시장은 보험 상품 종류는 다양하지만 상품에 가입하려면 소비자 스스로가 자신의 리스크를 파악하고 각각의 상품에 개별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이에 따른 시간과 비용 부담도 모두 소비자의 몫이다. 따라서 한국의 보험 시장은 소비자가 아닌 공급자 중심의 시장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를 중심으로 한 공제가 필요하며 이러한 공제는 사회적경제 조직에서 가능하다.”     


이 연구원은 “한국의 사회적경제가 공제사업을 할 수 있게 하려면 국회에 계류 중인 사회적경제기본법 안에 공제사업 근거를 마련하는 방안, 공제조직을 자율적으로 설립할 수 있도록 공제기본법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보험전문가들 역시 공제를 위한 법, 제도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영보험회사와 동일한 시장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공제조직은 규제가 동일하지 않아 소비자 보호에 어려움이 있고 경쟁의 불공정이 생겨날 수 있다는 이유다. 공제는 보험과 비교할 때 운영조직의 형태와 규제체계를 제외하고는 거의 동일하다.

자료 : 보험연구원, 2011년

유럽연합,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에서는 공제조합도 보험사업을 하면 보험감독기관의 감독을 받는다. 미국에선 우애조합(Fraternal Benefit Society) 등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비영리 보험조직이 있어 각 주의 보험법, 공제보험법, 비영리회사법 적용을 받는다. 


독일은 보험감독법에 상호보험조합 조합을 두어 공제조직을 규제한다. 프랑스는 모든 보험사업을 경제재정산업부가 규제하되 상호부조조합 및 절약조합만 고용연대부가 규제한다. 영국은 친목조합법(Friendly society Act)에 근거해 공제조합이 한정적인 보험사업을 하도록 규정하고 금융감독청이 감독한다. 일본은 모든 공제를 규제대상에 포함시키고 선별적으로 적용 제외 범위를 지정하는 방식을 쓴다.     


사회적경제기본법 혹은 공제기본법 같은 법적 기반이 생긴다면, 더 많은 자조조직이 기반을 얻을 것이다. 과거형이던 계의 미덕을 현재형으로 이어갈 길이 놓일 것이다. 


#CC_BY  #이 저작물은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공동진행 연구결과입니다. 저작자명 및 출처, CCL 조건만 표시한다면 제한 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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