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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May 16. 2020

노조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

어느 날 아침 문득,

어떤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탕"하고 칠 때가 있다. 그리고 결심으로만 끝나거나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일이 있고 그냥 우울하게 생각만으로 그칠 때가 있다.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위해 굶겠다거나 운동을 해야겠다와 같은 실천을 바로 하지 못하지만, "오늘부터"라고 결심을 하는 일.  어느 날은 그 남자하고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출근길에 그의 회사에 불쑥 찾아가 그간 주고받은 사진, 편지, 선물을 돌려주고, 오는 길에 '내가 너무 성급했나?'라는 후회와 '뺨이라도 때릴 걸, 정강이라도 차주고 올 걸'하며 배신감으로 뒤범벅되는,  나도 모르게 실천에 옮겨버리고 마는 일.  사표를 써야겠다고 머리를 스치지만, 행동으로는 좀처럼 옮기지 못하는 일 등. 


그런데 행동까지 하게 되는 일은 보통  갑자기 떠오른 것 같지만, 꾸준히 머릿속을 맴돌며 해야 하지만 하지 못했던 어떤 일일 경우가 많다.


어느 날 아침, 노조에 탈퇴 의사를 밝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탈퇴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망설임이 있었다. 뭔지 모를 망설임으로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가 불현듯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때임을 느낀 날, 노조를 찾아가 탈퇴서를 작성했다.


노조원이 절대로 부족했던 회사 초창기에 팀장도 노조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10년 가까이 노조원으로서 팀원들과 어울릴 수 있던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평소의 팀장과 팀원이 아닌,  같은 노조원으로서 회사에 대해 바라고 기대하는 것들이 팀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에, 그들과 같은 입장인 것 같았다. 경력직으로 모인 사람들이어서 나이도 경력에서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으니. 그러나 신입들이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위로 밀려났다. 직급이 높아진 게 아니라 그들과의 심리적 거리에서 어느새 윗 세대, 기존 세대로 밀리고 있었다.


"노조가 왜 어린 후배들의 의견만 대변하는가, 우리도 노조원인데 왜 우리 의견은 반영하지 않는가" 라며 세월을 함께한 후배와 팀장들의 볼멘소리에 같이 맞장구를 치다가 알았다. 그게 노조의 역할이 아닌가 하는.  구성원의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은 노조원들을 대변하는 것이 노조의 할 일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자리를 비켜줘야 할 사람은 비켜줘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막상 탈퇴서를 제출하기엔 시간이 좀 걸렸다. 누구도 내게 탈퇴하라거나, 탈퇴하지 말라거나 하지 않았으나 혼자만의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번 신입들의 수습이 끝날 때 탈퇴하자, 그러면 더 많은 노조원이 생기는 것이니 노조의 힘을 빼는 일은 아니다, 10년 가까이 노조회비를 냈으니 난 의리는 지킨 거다'와 같은.


그러다 망설임의 이유를 깨달았다. 한참 어린 후배들과의 심리적 거리감으로 생각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놓지 못한 건, 소속감 때문이었음을. 다르면서 같은 양 취할 수 있었던 한 무리라는 소속감으로 나 스스로도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직급과 관계없이 동급의 노조원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으니 고리타분한 기성세대가 아닌 것으로, 나이차는 있으나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착각을, 아니 그런 착각으로라도 그 무리에 남아서 그들이 "꼰대"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닌척하고 싶은, 내 안의 유치함을 알아챈 것이다.


탈퇴원에 서명을 하고 노조 사무실을 나서며 한 시대를 마감하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자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 20대 시절의 마음이 40대가 되어서야 나이와 별개로 비로소 마감되는 느낌을 받았을 때처럼 쓸쓸하면서도 홀가분한 마음.


인생은 뒤로 돌 수 없고 앞으로만 가야 하는데, 떠밀리지 말고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 지나가는 것들을 붙잡고 매달리며 떠밀리듯 앞으로 간다.  나이를 먹는 만큼의 지혜와 안목을 키우기보다는 나이 들고 싶지 않다는 부질없는 마음에 매달린다. 그 와중에 그래도 이렇게 한 번씩 깨달음을 얻으며 앞으로 걸어갈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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