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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Dec 12. 2021

느슨한 연대감

내가 선호하는 인간관계

요즘 MBTI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혈액형이 뭐냐고 물어보던 사람들이 MBTI가 뭐냐고 물어본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MBTI를 잘 모르던 시절에 친구 5-6명이 강사분을 초청하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친구 중 한 명이 심리 공부를 하다가 친구들한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소개를 해서 관심 있는 친구끼리 모였던 기억이 있다. 그때 검사비를 내고 수십 문항에 달하는 질문에 답을 했는데 검사 결과는 INTP였다. 그 유형의 특징이 무엇이었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고, 우리나라에는 잘 없는 유형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만 남아있다.  그 후로 최근에 하도 여기저기서 물어보는 바람에 인터넷에 무료로 떠도는 여러 가지 방식의 것 중 하나로 검사를 했는데 INFJ로 나왔다가 어떨 때는 INTJ로 나왔다가 한다. INFJ든 INTJ든 INTP든 읽어보면 다 내 얘기 같아서 무엇이 내 성격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건 IN이어서 내향적이면서 직관적이라는 건데, 스스로 확실하다고 느끼는 건 내향적이라는 거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후천적으로 사회성이 길러진 탓에, 일로 만난 사람들은 내가 "내향적"이라는데 고개를 갸웃할 때가 많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대화를 잘하고, 먼저 말 걸고 사람들 앞에서 말도 곧잘 하기 때문에 회사 직원들은 물론이고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무척 외향적인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그렇게 온 에너지를 쏟고 난 후 집에 가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된다.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움직이고 싶지도 않아서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다가 씻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주말은 약속을 잘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주말에만 시간이 된다고 하면 토요일은 약속을 해도 일요일에는 집에만 있는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뒹굴거려야 월요일부터 일주일을 보낼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주중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활발하게 톡, 문자, 전화를 통해 사람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면서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지만, 퇴근 후 그리고 주말에는 모든 걸 잊게 된다. 낮에 친구가 보낸 톡이나 문자에 바빠서 답을 하지 못한 경우 퇴근 후에라도 연락하면 되는데 잊을 때가 많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기억을 해내고 늦은 답을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무심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엄마한테도.

초, 중 고를 다니면서 학년이 바뀌고 반이 바뀌면 친구도 항상 바뀌었다. 그때 그 시간에 친하게 지낸 친구와 오랜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다. 환경이 바뀌면 바뀌는 거구나라며 친한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혼자서 시간을 잘 보내는 아이였다.


이런 기질은 대학에 들어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일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친해지기 위해 내가 양보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친한 친구를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3-4명이든 5-6명이 한 무리가 되어 친구가 되는 경우에는 더욱 어렵지 않았다. 대신 그중 누구와 더 특별히 친해지지는 않았다. 두루두루 친한 관계였지 특정 누군가와 더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는데, 어느 무리든 더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있게 마련인데, 난 그렇지 않았다. 싫은 사람도 딱히 없었지만 더 친한 사람도 없었다. 회사에서 만난 친구들도 그렇다. 입사 동기이든 동갑내기라 친해진 관계이든 일정 거리가 항상 있었다. 회사 밖에서 자주 만나 영화 보고 밥 먹고 여행도 같이 갔지만, 끈끈함은 없었다.  소위 "베프"라고 하는 친구도 일거수일투족을 서로 속속들이 아는 관계는 아니었다. 속내를 얘기는 했지만, 어디든 함께 가고 무엇이든 함께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지방에서 온 친구는 나를 "서울깍쟁이"라고 하기도 했다. 거리가 느껴진다는 표현을 그렇게 했다.


거리를 일정하게 두는 관계. 난 이런 관계가 좋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리 안에 있다고 그 안의 사람들만 챙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무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사람들을 싫어한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 초년병일 때는 이런 "우리"라는 문화가 강해서 MT, 회식에 빠지지 못해 어려운 적도 있었다. 한 때는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서로 생일을 챙기는 친구와 사람들, 속내를 얘기하는 친구와 매일 만나지 않고 매일 전화나 톡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지낸다. 슬픈 일을 겪으면 슬픈 대로 기쁜 일을 겪으면 기쁜 대로 소식을 전하며 산다. 어떤 해에는 자주 만나고 어떤 해에는 일 년에 한 번 보며 지낸다.  나이를 먹을수록 친구들도 내 성향을 알아서인지 어렸을 때처럼 달라붙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밖에 없고 나 또한 그렇다.

그렇다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얽매는 건 싫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느슨한 연대감".

직장인 연극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이 이 취미활동이 왜 좋은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 이 단어는,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 그래서 이 동호회 사람들이 익숙한 듯 친하지 않은 어색함이 있지만 불편하진 않았던 이유가 이거구나!'라는 깨달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옥죄지 않되 각자 뿔뿔이 흩어지지 않는 연대감을 갖는 것. "무심한 성격"이라는 말에 때로 스스로 상처 받기도 하고 고민도 했었는데, 난 이런 성향의 사람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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