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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Mar 01. 2022

코로나19 환자가 되어 알게 된 것 I

1편 : 우리나라, 좋은 나라

코로나19 발생 초기 직원 1명이 걸렸던 이후로 2년간 한 명도 걸린 직원이 없었는데, 올해 들어 한 명, 두 명 확진되기 시작했다. 오미크론으로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와 무관하지 않게 가깝게 일하는 직원들이 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여파로 1주일에 PCR 검사를 세 번 받았다. 처음엔 어린이 집에 다니는 아들로 인해 1호로 확진된 팀장과 얘기를 나누었기에 받았고 두 번째는 그 팀장과 식사를 한 팀원이 이틀 뒤에 확진되어, 회사에서 선제적 차원으로 전 직원 PCR 검사를 받으라고 하여 받았다. (1월만 해도 PCR은 누구나 받을 수 있었다) 하루 걸러 한번 검사를 받고 두 번 다 음성이었다. 세 번째는 스스로 몸살 기운이 느껴져서 받았다. 뭔가 한 느낌이, 기분 나쁜 증상이었다. 확 아픈 건 아니지만 살짝 열이 있는 것 같고, 으슬으슬 추운데 벌벌 떨리는 오한은 아니고,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갈 정도여서 약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잘 판단이 서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출근 당일 아침에 잠깐 망설였었다. 코로나 시국이므로 ‘아프면 집에서 쉬기’라는 표어도 있는데, 직장생활을 오래 한 습관으로 ‘웬만하면 출근해야지’라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프다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면 아픔도 덜하고 또 실제 아프지 않은 경우도 있었기에 시간에 맞추어 출근했다. 그러나 출근하자마자 바로 코로나 걱정이 덜컥 되었다. ‘혹시 코로나면 어쩌지?’라는 우려로 검사를 먼저 해보는 것이 안전하겠다는 생각에 “몸이 좋지 않아 PCR 검사받고 재택을 하겠다”라고 회사에 말을 한 후 퇴근했다. 그 사이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고 기침도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감기약을 샀는데 통증이 좀 완화되는 것 같았지만, 마음이 께름칙하여 집에서도 마스크를 계속 끼고 부모님과도 밥을 따로 먹었다. 약을 먹고 났더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코로나의 전형적인 증세인 열이 없고 후각, 미각도 살아있어서 내심 ‘코로나는 아니겠구나, 감기인가 보다’ 하며 안심을 하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보통은 9시 전에 음성이라는 문자 통보를 받았는데 그날은 10시가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회사에는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오늘도 재택 하겠다고 미리 말을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음성은 문자 통보, 양성은 전화 통보를 한다고 들었었기에 문자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직원들이 별 이상 없을 거라고 위로하는 말에 “그렇겠지!”하고 맞장구를 치며 마음을 졸였다. 10시 40분에 문자가 왔다. ‘1/25 코로나19 유전자 검출검사(PCR) 결과...’ 여기까지 읽으면서 음성이라고 할 줄 알았다. 문자로 왔으니까. 그런데 그다음 단어는 “양성입니다”였다. ‘양성!!!!’ 그렇게 회사의 4호 확진자가 되었다. (3호 확진자는 사내커플인 2호 확진자의 남편이다) 감염 경로는 알 수 없었다. 이미 확진되었던 직원으로부터 감염된 것 같지는 않았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밀접 접촉을 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아마도 어디에선가 나도 모르게 옮은 것 같았다. 의심되는 곳은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마음이 좀 풀어져 있기는 했었다. 친한 사람이든 가족이든 회사에서도 그동안 아무도 걸린 사람이 없어서 코로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양 안일한 생각을 하던 차였다.      

직접 “양성”이라는 판정을 받으니 처음에는 잠깐 멍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얼른 회사 담당자와 팀에 알렸다. 회사는 즉각적으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층의 전 직원에게 PCR 검사를 받고 재택 하라고 했고, 우리 팀원들은 명절 연휴가 시작될 때까지 재택 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는 연휴가 끝나는 때에 PCR 검사를 한 번 더하고 음성으로 확인된 후에 출근하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보건소와 구청에서 차례대로 전화가 왔다.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증세를 물어보고 동선을 확인했다. 코로나는 보통 증세가 나타나기 2일 전부터 전파력이 생긴다고 하며 마스크 벗고 밥을 같이 먹은 대상자만 확인하고, 내가 방문했던 곳은 확인하지 않았다. 확진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전처럼 동선을 꼼꼼히 파악하지 않고 실제로도 확진자가 다녔던 장소에는 이제 알리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그나마 이때는 아직 보건소나 구청의 대응력에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양성 판정 문자를 받은 후 1-2시간 내에 전화가 왔고, 자택격리를 권하길래 고령의 부모와 동거하고 있고 동선 분리가 어려우니 생활 치료소(생치)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몇 시간 되지 않아 바로 생치 배치를 해주었다. 그리고 ‘의료지원반’이란 톡이 뜨더니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의사가 직접 전화 와서 증세를 더 자세히 물어봤다. 해당 증세로 먹었던 감기약을 찍어 보내라고 하여 약을 확인하고 생활 치료소를 원하는지 병원으로 가기를 원하는지 최종 확인을 하였다. 짐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를 자세히 알려주고, 구급차가 몇 시쯤 도착 예정인지를 알려주더니 그 시간에 맞추어 내려오라는 전화가 왔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지 않고 조용히 와서 나를 태우고 이동했다.

      

구급차를 보자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의 안내에 따라 구급차에 오르자 나와 목적지가 같은 4명의 사람이 먼저 타고 있었다. 재난 영화에서 감염된 사람들을 태우고 시설로 이동하는 장면에 내가 엑스트라 배우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낯선 사람들과 구급차에 몸을 싣고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어리둥절하게 있었다. 입었던 옷은 생치 퇴소할 때 모두 버려야 하니 낡은 옷으로 준비하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추우니 그 위에 패딩을 걸쳤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두꺼운 겉옷 없이 집에서 입던 편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양말도 신지 않고 슬리퍼 차림이었고 또 어떤 사람은 가방도 없이 쇼핑백만 달랑 들고 있었다. 난 10일이라는 기간 동안 (지금은 격리기간이 7일로 줄었다) 일을 하겠다고 노트북, 회사 다이어리, 못 읽고 있던 책, 생치에서 갈아입을 옷 등을 너무 바리바리 쌌나 싶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퇴소할 때 이 패딩도 버려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갑자기 들었다.


생전 처음 타 본 구급차 안에서 본 바깥 풍경은 기이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고 지나가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활 치료소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파란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입소 후 지켜야 할 수칙과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엘리베이터에 한 명씩 타게 한 다음 각자 배치된 객실로 이동하도록 했다. 무척 엄중하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는데 이 장면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수많은 영화의 포로수용소, 감옥 등 사람들이 갇히는 어떤 장면이 떠오르면서, 어디에선가 감독의 ‘컷’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생활 치료소는 집 근처에 있는 호텔이었다. 그곳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호텔이었는데 코로나 시국으로 영업이 잘 되지 않았던 탓인지 생활 치료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호텔을 지날 때마다 로비가 잠겨 있어서 폐업을 한 줄 알았는데 용도가 바뀌어 있었다. 객실은 다행히 1인실이었다. 2인 1실로 배정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운이 좋았다. 객실에 들어서니 구호물품 박스가 놓여있다. 그 안에는 이불과 베개, 종이컵, 치약, 칫솔, 샴푸, 린스, 바디워시, 빨랫비누, 수건, 휴지, 컵라면 등이 들어있었는데, 확진자들이 사용한 모든 것은 ‘의료폐기물’이기 때문에 다 버리고 가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자 새것들인 이 물품들이 너무 아깝게 여겨졌다. 입소하는 사람에게 각자 사용할 텀블러나 컵을 가져오라고 하면 종이컵은 없어도 되고, 세면도구도 가져와서 쓰고 버리고 가면 새 물품으로 준비하여 나눠주지 않아도 되는데, 새것들을 다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아까웠다. 게다가 라면이나 커피 등 나처럼 먹지 않는 사람은 손도 대지 않을 물건인데 이것도 버려야 하나 싶어서, 운영팀에 확인했더니 방안에 들어왔던 물품은 다 버리는 것이 원칙이라는 말을 한다. 바이러스가 퍼지면 안 되니 버려야 하겠지만, 물자 낭비와 환경파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구호물품 상자와 새 이불과 베개


객실에는 구호 물품 외에 체온계, 혈압계, 산소포화도 측정기가 있어서 하루 2회(아침 8시, 오후 3시) 측정하여 앱에 기록하도록 되어 있었다. 증세에 맞는 약이 처방되어 객실로 갖다 주었고 ‘국가트라우마센터’라는 곳에서는 색연필과 색칠할 수 있는 그림책을 주었다. 입소 다음 날에는 구청의 심리 지원반에서 정신건강 자가진단을 할 수 있는 링크를 보내왔다. 하루 세끼 도시락이 배달되어 왔고 간식, 야식거리가 매일 도시락과 함께 들어왔다. 밀접접촉자였던 부모님에게도 방역물품이 전달되었고 하루 2회 체온을 확인했다고 한다. 식료품은 지원금으로 대체되었다. (지난 토요일에 격리 해제된 엄마가 확진되었을 때는, 밀접접촉자인 아버지에게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만큼 대응 인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우리 집 소독은 내가 생치에 들어 간 다음날 바로 실행되었다.       

이런 일련의 시스템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매뉴얼에 따라 착착 돌아가는 느낌. 이 모든 것이 무료이고 확진자와 밀 접촉자에게는 생활지원금도 준다. (몇 가지 요건에 맞아야 받을 수 있지만) 물론,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것이지만 세금이 잘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언제 우리나라가 이렇게 좋은 나라가 되었나 싶었다. 20대 때는 이 나라가 모래성을 쌓은 듯, 기틀이 제대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이든 높이 높이 쌓아 올리기만 하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다. 거품처럼 금방 사라질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삼풍백화점, 성수대교와 같은 대형 사고들이 있었고 IMF를 겪으면서 그렇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십여 년이 지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뉴스가 실감 나지 않았는데 이번 일을 겪으며 ‘우리나라도 선진국 수준의 복지 시스템이 있구나’ 싶었다. 지금은 확진자가 너무 많아서, 엄마가 확진되었을 때는 보건소에서 거의 하루가 다 갈 무렵에 연락이 왔고 구청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방역물품과 약을 하루 뒤에 받았지만, 하루 2회 꼬박꼬박 전화로 엄마의 증상을 확인했다. 약이 더 필요하다고 하자, 또 집으로 가져다주었다. 쓰레기는, 내가 확진되었을 때처럼, 의료폐기물이라고 따로 수거해가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느슨해졌다. 그러나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 정도 숫자로 증가하면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로나19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기와는 다르게 가벼운 증상만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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