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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Jun 19. 2022

갖고 싶은 얼굴

중학생 때였는지 고등학생 때였는지 알 수 없다. 그 시기에는 수업과 관련 없는 내용의 얘기들에 귀를 쫑긋 세울 때였는데,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과목의 선생님이 해주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 나이 마흔이 넘으면 그 이후의 얼굴은 본인이 책임지는 거다. 내가 어떤 얼굴을 가질 것인가는 각자에게 달려있다"라는 말씀. 사십 이전은 부모님이 주신 타고난 얼굴로 살지만, 불혹의 나이를 넘긴 후의 얼굴은 본인이 만든 것이라며, 얼굴에는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담긴다고 하셨다. 그 당시 떠올린 건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너그럽고 인자한 표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지’하는 마음이었다. 무슨 영향을 받아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멋진 어른’의 얼굴 중 하나는 ‘너그럽고 인자한 표정을 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

아주 어렸을 적, 잠든 엄마의 미간 주름이 깊게 잡혀 있는 것을 보고 그 주름을 손가락으로 펴던 기억이 난다. 손가락에 힘을 세게 주며 ”엄마는 왜 자면서도 인상 쓰고 자?”라고 했었다. 엄마는 잠결에 ”내가 그래? 글쎄... 왜 그러지?”라고 대답하시고는 다시 잠이 드셨다. 그렇게 가끔, 주무시는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간 주름이 또 있네’하며 펴다가, 어느 날에는 ”인상 좀 쓰지 말고 자요”라고 타박한 적도 있다.     


요즘 굳건하게 자리 잡은 내 미간 주름을 보며 ‘엄마의 영향인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늘 엄마 얼굴을 보고 자라서 나도 자연스럽게 주름이 생기는 표정들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4남매를 낳고 돌보며 집안 살림하던 그 시절 20대의 엄마는, 본인 스스로도 체 어른이 되기 전에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부딪히는 대로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연스럽게 미간 주름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니 내 이마의 주름은 대물림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미간 주름을 엄마 책임으로만 돌리려는 건 아니다. 그렇게 책임을 돌리는 일은, 선생님 말처럼 마흔 살 이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이미 마흔 살을 훌쩍 넘겼고 오십 대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어릴 적에 갖고 싶었던 얼굴을 아직 갖지 못한 건 순전히 내 몫의 문제이고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미간의 세로 주름을 인식했던 삼십 대 때부터 이 주름이 자리 잡지 않게 하려고 열심히 아이크림을 바르고, 거울 보며 웃어보기도 하고 이마에 힘을 빼고 평안한 표정을 지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노력은 단편적인 노력이었을 뿐, 일상생활 속에서 무심코 짓는 표정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말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게 될 때마다, 그렇게 인상을 쓰고 말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 때마다, 무슨 걱정이나 고민거리가 있냐며 물어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갖고 싶지 않은 주름을 갖지 않기 위해 한 노력은 허사였다.      

무엇이 그리 걱정이었는지, 무엇에 그렇게 화를 낸 건지 알 수 없지만, 인생의 많은 시간을 분명히 찡그리며 지냈다는 증거가 얼굴에 남아있다.      


미간 주름과 함께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는 바로 웃는 입꼬리다. 웃는 상을 만드는 가장 핵심이 입꼬리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 사람은 성공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유명한 셀럽들을 보면 대부분 웃는 상이고 그들이 웃을 때는 입꼬리가 위로 싸악 잘 올라간다. 일부는 성형으로 입꼬리를 올리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늘 대중 앞에서 웃는 모습을 보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간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은 거울 보며 웃는 연습도 엄청 많이 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가끔 아침에 거울 보며 웃고, 사진 찍을 때는 치아 보이며 웃거나 최소한 미소를 띠고 때로는 억지로 입꼬리를 위로 당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노력도 내 몸에 내재화까지 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집중을 하고 있을 때 표정은 영락없이 화가 나 있거나 뭔가 불만족스러운 사람의 얼굴이다. 회사 책상에 십 년이 넘도록 거울을 가져다 놓고 수시로 내 얼굴의 표정을 보려고 했지만, 늘 거울만 놓았을 뿐이다. 그 거울이 나를 제대로 비춘 적은 없다. 문득 거울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각도가 내 얼굴을 살짝 비켜간 채로 놓여있다. 각도를 내 얼굴에 맞게 맞춰놓았다가도 어느새 그 자리에 거울이 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화장을 아침에 한 후로 퇴근할 때까지 잘 고치지 않아 개기름이 코와 이마에 흐르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로 거울을 보지 않으니, 표정 연습을 위해 거울을 보는 일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표정 짓는 노력만으로 원하는 얼굴을 만들 수 있을까?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면 행복 해 진다’는 말처럼, 억지로라도 웃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밝아지는 것처럼 ‘인자한 표정 연습을 하다 보면 인자한 인상이 되겠지?’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싶던 얼굴은 그렇게 인위적이고 단발적인 시도로 얻을 수 있는 얼굴이 아니다. (혹시 표정 연습을 10,000시간 동안 한다면 가능할까?) 선생님 말처럼 평소의 모습,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삶의 자세가 그 사람의 얼굴을 만드는 것일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이어야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묻어 나올 것이다.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면, 나는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게 물건이든 마음이든. 타인에게 무얼 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지만, 나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학 때 친구들과 길을 가다 예쁜 액세서리를 보고 “얘들아, 나 저거 사줘”라고 말하는 친구를 보고 속으로 엄청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겪는 희한한 일이었다. 난 집에서 부모님에게 뭘 사달라고 해 본 적이 없다. 딱히 갖고 싶은 물건이 있지 않았고 입고 싶은 옷이 따로 있지 않았다. 엄마가 사주는 대로 입고 다녔다. 그래서 ‘사달라’는 소리를 쉽게 하는 친구가 아주 낯설었다. ‘어떻게 사달라는 소리를 하지?’라고 되뇌며,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 와 중에, 한 친구가 서슴없이 “그래, 내가 사줄게” 하면서 그 친구와 팔짱을 끼고 가게 앞에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헉, 쟤는 또 사주겠다는 소리가 어쩜 저렇게 쉽게 나오지?’하며 또 한 번 놀랐다. 한 번도 누군가 내게 뭘 사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기는 고등학교 때까지 존재감 없이 학교 생활을 한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았고, 그나마 학교에서 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학교 가서 만나는 친구이지 주말이나 방학 때 따로 만나는 친구들이 아니었다. 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학년이 바뀌어 반 친구가 바뀌면 다른 친구를 만나고, 그 이전의 친구와는 학교에서 오며 가며 마주치면 인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따로 그 인연을 이어가지 않았다. 친구를 사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친구와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팔짱 끼고 수다 떨던 두 친구는 결국 그 액세서리를 사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달라던 친구는 왜 사주지 않냐고 따지지 않았다. 둘은 그저 기분 좋게 웃고 떠들었다. 그 광경도 아주 생경했다. ‘아니 사준다고 해놓고 왜 사주지 않는 거지?’.  나는 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주기로 했으면 사줘야 하고, 만나기로 했으면 만나야 하고 뭘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하는. 그런데 저 둘은 서로가 말한 게 지켜지지 않았는데도 개의치 않고 기분 좋은 채 갈 길을 가고 있다니.     


그 후로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호의를 잘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직업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해 그 서비스를 받은 사람은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여행 잘 다녀왔다고 선물을 사다 주는 손님들이 있었다. 난 그저 여행상품을 팔기 위해 손님이 원하는 조건에 맞는 상품을 안내하고 예약을 했을 뿐인데, 그 손님들은 덕분에 잘 다녀왔다며 내 선물까지 사 오고 기어이 회사에 찾아와 주고 갔다. 내가 되돌려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선물을 받으니 기분 좋고 보람차기도 했지만, 그렇게 챙겨주는 손님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당연히 본인들이 받아야 했던 서비스고 내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무언가를 얻으려고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내가 받았던 것에 감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받지 않았어도 그저 나누기 위해 뭔가를 주는 사람들. 세상에는 별다른 욕심 없이 마음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비해 내가 인색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게 사십을 넘기면서부터다. 타인의 호의를 받았어도 일회성의 지나가는 것이라고, 때로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나친 것들이 많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런 호의들을 되돌려 주지 않았고 당사자가 아니어도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베풀 수도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받은 만큼 주기만 했었다.


친구와 관계에서도 그랬다. 주는 만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다행히도 옅었다. 주었는데 받지 못하는 경우는 그대로 섭섭하긴 했지만 마음에 오래 남지 않았다. 그런데 줄 때는 받은 걸 생각했다. 받은 만큼 주어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받은 것보다 더 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를 못했다. 가장 부끄러운 일화 중 하나가 캐나다에 사는 친구에게 생활비를 지불했던 때다. 삼십 중반에 회사생활을 비롯한 모든 것에 너무 지치고 힘들어 무작정 관두었던 때가 있다. 낯선 환경에서 살아보겠다고 캐나다에 이민 간 친구 집에 얹혀살았다. 당연히 생활비를 내기로 했는데 친구는 월세를 받는 것도 이상하니 가끔 장을 보는 비용을 내고 한국에 가면 자기 동생에게 용돈을 주라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캐나다의 월세를 환산하여 친구 동생에게 보내주었다. 그때 보낸 금액은 기억나지 않지만 일원 단위까지 계산해서 보냈었다. 어찌나 인색한 계산법인지! 만원 단위로 끊어서 보냈다면 얼마나 근사했을까. 일도 아니고 친구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이었는데, 그걸 일원 단위까지 계산해 보낸 나의 꽉 막힌,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을 뒤늦게 깨닫고 무척 부끄럽고 창피했었다. 그걸 사십 넘어 어느 날 문득 알아챘다.  내게 정 없다고 했던 이, 삼십 대 시절의 친구들 말에는 ‘이 인색한 친구야!’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만나주는 친구들아, 고맙다).     


지금은 인색함을 고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베푸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일. 내가 받았던 것을 나누는 일. 나누는 것은 꼭 받았던 사람에게 되돌려주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선순환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지금 회사의 초대 대표가 했던 말씀이 있다. “난 월급의 10%는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항상 10% 정도는 일로 만나야 하는 사람들, 동료들에게 썼어”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 만큼 후배가 많아지고 일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그게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나누기가 쉽다. 내가 소유한 것은 내놓기가 쉽지 않지만, 내게 맡겨진 것이라면 나누기가 쉽다. 내가 얻은 것이 나만의 노력이 아니라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뤄낸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놓기가 편하다. 욕심이 없으면 미련도 없다.     


어렸을 적 갖고 싶었던 ‘너그럽고 인자한 얼굴’은 아직 갖지 못했다. 단발적인 표정 연습만으로는 역부족이었는 데다가 이미 내 얼굴은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입꼬리는 점점 처지고 있다. 주름살 제거 크림을 미간에 열심히 바르고 있지만, 없애는 건 요원한 일이 되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넓고 여유 있고 어진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비록 매일매일 시험에 드는 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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