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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Nov 20. 2022

오십 넘은 자식의 안부가 궁금한 부모님

근 2년 혹은 3년 만의 일이다. 새벽 1시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코로나 이전에는 회사 사람들, 친구들, 동호회 사람들 등과 어울리느라 종종 늦었기에 새벽 12시-1시는 그리 많이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날은 옆 동네 사는 회사 후배와 “걸어서 퇴근하자!”라고 의기투합하여 걷다가 우연히 들린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여러 가지 주제로 얘기 보따리를 풀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얘기는 다음에 하자고 기약하며 헤어졌다. 다음날이 토요일이니 심적으로 느긋했던 것도 같다. 오래간만에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집으로 가는 길, 휴대폰을 보니 엄마와 아빠, 심지어 여동생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수다 삼매경에 빠져 진동으로 해놓은 전화기가 울리는지도 몰랐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여동생에게 전화했더니 “왜 전화를 받지 않아?”라고 하며 “부모님이 언니랑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하셔서 내게도 전화했다”라고 한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있을 계획은 아니었기에 미리 늦을 거라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일찍 잠자리에 드시는 엄마는 중간에 깨어보니 아직 들어오지 않은 딸이 걱정되어 문자를 하셨고, 아빠는 워낙 늦게 주무시는 분이 11시가 넘자 전화를 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연락되지 않으니 걱정되실 만했다. 그래서 다들 잠들었을 그 시간에 여동생에게 전화하고 남동생들에게 문자를 남기시고. 집에 들어가니 두 분 모두 못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셨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린 일은 죄송했다. 다음날 오후에 집을 나서는 내게 아빠가 한 말씀하신다. “집에 일찍 와. 오늘 너 운수를 봤는데 남자를 조심하래”라고. 순간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내 나이가 몇인가?’, ‘이 나이에 남자를 조심하라니!’. 피식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마스크로 감추며 고개만 끄덕였다.      


“차 조심해라.”, “길 조심해라.”,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라는,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들의 고전적인 레퍼토리는 자식이 육십, 칠십이 되어도 똑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남자 조심해라”라는 말을 오십이 넘은 미혼의 딸에게 건네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아빠에게는 당신의 딸이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을 테니. 반면에 엄마는 내게 “남자 조심하라”와 같은 말은 하지 않으신다. 엄마는 오히려 마음에 드는 남자 있으면 “하룻밤이라도 어떠냐!”라는 파격적인 말을 하신다. 결혼하지 못한 딸이 안쓰럽지만, 그 방점은 남자가 아니라 ‘아이’에게 있다. “자식이 있어야 외롭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시므로. 딸 곁에 남자든 아이든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두 분 모두 같다.     



뭔가 입이 궁금하고 심심한 오후 3-4시 무렵은 간식을 먹기 딱 좋은 시간이다. 나는 보통 과일을 싸 가져가 먹고는 하는데, 엄마가 은행을 구워 꼬치에 가지런히 꽂아 주신 적이 있다. 혼자 먹기에는 양이 좀 많아서 팀원에게 한 꼬치를 건네었더니, “이거 팀장님 어머니가 하신 거예요?”라고 묻더니 “팀장님은 사랑받는 딸이시군요” 한다.

    

사랑받는 딸. 엄마의 사랑은 늘 이렇게 별것 아닌 것 같은 일로 불현듯 느끼게 된다. 엄마는 내가 어려서부터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 “결혼하면 지긋지긋하게 하게 될 테니 지금은 안 해도 돼.” 그래서인지 두부나 콩나물을 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심부름도 잘 시키지 않으셨다. 그렇게 삼십 중반이 될 때까지 집안일을 으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독립 이후부터 시작한 살림살이가 익숙해져 부모님과 다시 합친 이후에도 주말이면 청소, 빨래, 설거지, 요리 등을 했다. 엄마도 한동안은 내가 하는 것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청소나 빨래와 같은 일은 계속 별 제재를 하지 않으시지만, 부엌일만은 손도 못 대게 하신다. 어쩌면 직장 다니느라 늘 피곤한 모습이 안돼 보여서일지 모르겠다. ‘물 한 방울 묻지 않게 하겠다 ‘라는 결심이라도 하신 건지 설거지도 못 하게 하신다. 나 혼자 먹은 그릇을 치우는 일인데도 “그냥 놔둬, 내가 하게” 하시고 그 말을 못 들은 척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금세 옆으로 달려와 나를 밀쳐내며 본인이 하신다. 엄마가 집을 비운 시간에는 차려 먹고 치우는 일이 내 몫이어도 엄마가 집에 같이 계신 시간에는 결코 용납을 하지 않으신다. 어떤 날은 그런 엄마가 고마워서 못 들은 척 슬그머니 손을 놓고 소파에 가 앉는 날이 있다. 또 어떤 날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 했어, 내가 할게요”라고 씻던 그릇을 꼭 잡고 엄마를 밀어내는 때도 있다. 엄마는 내가 싱크대 앞에 서기만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게 설거지야” 하시며 말리시는데, 문득 속으로는 '언제부터 설거지를 좋아하셨지?'싶다.


여태 보아온 엄마는 '엄마'라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열심히 집안일을 하시던 분이지 좋아서 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종종 “내가 좋아하는 거야” 하시며 음식을 만드신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주로 집에 있는 주말에 하신다. 아마도 내게 맛있는 걸 먹이시려고, 본인에게 마법을 걸듯 주문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중 내내 집에서 밥 먹을 시간이 없는 딸을 위해 주말이 되면 아침을 본인 손으로 차려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밥을 새로 하고 음식을 만들고.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몇 시에 나가?”라고 묻고는 하시는데, 오전 시간에 나가는 날에는 평소 기상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시고, 오후에 나간다고 하면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있게 준비하신다. 주말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시고는 저녁 음식은 무엇 무엇을 하겠노라고 얘기하신다. 이런 이유로 아빠는 “네가 있어야 반찬이 많아진다”라고 하신다.      


올 초에 코로나에 걸려 생활 치료소에 입소했을 때, 엄마는 문자로 잘 먹고 잘 자는지를 궁금해하셨고 아빠는 전화로 괜찮은지를 확인하셨다. 그것도 매일. 그때만 해도 코로나는 엄청 위중한 전염병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받았을 충격이 좀 컸을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정작 나는 몸살, 감기 수준의 피곤함만 있을 뿐 열흘 동안 호텔 방에서 편히 쉬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1인 1실에서. 부모님과 떨어져서 온전히 나만의 공간에 있는 것이 좋았다면 부모님은 서운함을 느끼셨을 테지만. 엄마는 언제 퇴소하는지, 몇 시에 나오는지를 물어보시고는 닭볶음탕을 하고 기다리고 있겠노라 하시며, 건강하게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건강하게 돌아오라' 말에 잠시 울컥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열흘을 꼬박 치료소에서 보내고 퇴소하는 날, 아침 10시에 예정되어 있던 시간은 11시를 훌쩍 넘겼다. 엄마가 짐이 많으니 택시 타고 오라고 하셨는데, 열흘 만에 쐬는 바깥공기가 너무 상쾌해 집까지 걸어갔다. 맛있는 음식을 하고 기다리고 계실 엄마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걷는 와중에 회사에서 온 문자에 답을 보내며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예정 시간보다 늦어져서 언제 집에 도착할지 궁금해하실 부모님에게는 전화를 드리지 않았다. '곧 도착할 건데'라는 안이한 마음으로. 12시가 다 되어갈 무렵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쯤 오고 있냐는 물음에 5분 안에 도착한다는 무뚝뚝한 답을 했다.


집에 들어서자 두 분이 반갑게 현관으로 마중 나오신다. 무사한지 얼굴을 살피시며 건강하게, 크게 아프지 않고 돌아와 좋다고 하시는데 아빠 손에는 소독제가 들려있고 마스크를 쓰고 계신다. 엄마는 겁도 없이 내 물건에 마구 손을 대시며 세탁할 것과 하지 않아도 되는 거를 구분하신다. 내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시며 같이 밥을 먹으려고 아침을 거르신 걸 알았다. 그제야 전화 한 통화하지 않은 자신이 참 부끄러워졌다.


엄마는 기어코 내 이불 빨래를 깨끗하게 해 놓으셨다. 그렇지 않아도 괜한 고생을 하실 것 같아서, 이불 빨래는 퇴소하고 집에 가서 할 테니 그대로 놔두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었는데, “어차피 나도 격리로 집에서 할 일이 없다”라는 애매한 답변을 하시더니. 부모님은 격리하러 구급차를 타고 가는 내 모습을 창문 밖으로 보며 기분이 아주 묘했다고 하셨다. 구급차는 보통의 경우에 탈 일이 없으니까. 입원 한번 해 본 적 없는 두 분에게 응급실, 구급차 이런 것은 현실감 없는 것이니. 그런데 그런 구급차에 딸이 타고 가는 것을 보셨으니 진짜 충격이 좀 있었던 모양이었다.     


건강검진 결과로 콜레스텔로 수치가 높게 나와 식단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당장 장을 보겠다고 하신다.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식단 관리'라는 단어 자체를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지만, 같이 사는 환경에서 모르게 할 수는 없어서 한 말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렇게 고생을 자처하신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된다고 했더니, 시장에 가야 싱싱하고 싸게 살 수 있다고 하신다.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오냐고, 먼 곳까지 기운 빼지 말고 간편하게 배달시키자고 했더니 본인이 직접 골라야 한다고 우기신다. 그리고는 엄마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치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주신다. 오늘도 난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출근한다.     



부모가 나이 들어 다시 아이처럼 되고 자식이 보호자 노릇을 하더라도, 부모 눈에 그 자식은 여전히 어린 자식인 것 같다. 남들은 오십 넘은 나이에 부모님과 산다고 하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부모님과 살면서 내가 받는 위안과 혜택이 더 크다. 소리와 냄새 때문에 예민하게 굴면 아무 일도 아니라며 안심시키신다. 가끔은 그런 말이 ’ 둔함‘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더 화를 내고 짜증을 낼 때도 있지만, 내가 사춘기 때 그랬던 것처럼, 그저 가만히 들으신다. 부모님 앞에서는 집 밖에서 절대로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한다. 남들 앞에서는 성숙한 어른인 척 굴지만, 집에서는 아니다. 여전히 철부지 같이 군다.     



먹을 것 제대로 못 먹고 입을 거 제대로 입지 못하고 한 푼 두 푼 아끼고 아끼며 절약을 하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예쁜 옷이나 하나 사 입어야겠다." 출근 준비를 하며 “제발 그러셔라”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구두쇠처럼 살아왔으면서 무슨 하소연을 하냐는 뉘앙스를 담아. 속으로는 그렇게 살아온 엄마에 대한 연민, 애틋함, 고마움이 있지만, 겉으로 내뱉는 말은 그렇게 무심하고 타박하는 말이다. "예쁜 옷을 어디 가서 사는지 알아야지..." 현관문을 나서는 내 등에 엄마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꽂혔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옷 사러 같이 가자고 했으면 되는데, 그 말도 하지 못하고 뭐가 바쁘다고 듣지 못한 척 나왔다. 불효자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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