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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Jan 09. 2023

궁금하지만, 두렵지 않은 미래

논현동 시장 근처에 사주를 잘 본다는 점쟁이가 있었다. 그는 내 사주를 보더니 “남의 장독은 잘 닦는데 내 장독은 잘 못 닦는다”라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 설명을 들었을 텐데, 그 의미는 기억나지 않고 저 말만 생각난다. 남산 3호 터널 옆 언덕 위에 있는 집에 살던 점쟁이는 내게 ‘도화살’이 있다고 했다. 도화살은 옛날이라면 기생이 될 팔자지만 요새는 ‘일’을 평생 하게 될 팔자라고 했다. 전라도 어디였던가, 신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짜 ‘신 빨’이 용하다는 점쟁이와는 전화상담을 한 적 있다. 그녀는 “서른아홉에 결혼한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었다. 삼십 대 초반에 들은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왜 그렇게 까마득히 먼 얘기처럼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과연 내게 그런 나이가 오기는 할까 싶었다. 그리고 ‘다 늙어서 만난다고!’ 했던 기억도 난다. 전화상담은 녹음까지 해서 우편으로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주었는데 그 테이프를 꽤 오래 갖고 있었다. ‘미래에 그녀가 한 말이 맞는지 맞혀봐야지’하며 잘 보관했다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어디론가 없어졌다. 결론적으로 내 결혼 나이는 맞추지 못했다. 그 나이 전후로 ‘결혼’할 징조는커녕 연애도 하지 않았다.

      

들을때는 뭔가 잘 맞히는 것 같아서 ‘와, 진짜 용하네!’하고 감탄을 하며 돌아오는데, 정작 미래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는지 머리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수첩에 주요 단어를 적어왔다. 그러나 그걸 다시 펴보는 일은 없었다. 한때는 내가 궁금한 걸 다 물어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듣고만 온다는 것을 깨닫고, 물어볼 말을 적어간 적도 있다. 어떤 사람은 궁금한 걸 물어보면 그것에 대해 비교적 답을 하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질문을 막고 자기가 할 말만 했다. 설명을 잘해주던 점쟁이는 홍대였던가, 안국동 근처였던가 살던 사람인데, 결과적으로 후배가 결혼할 것이란 예언을 딱 맞혔다. 심지어 ‘몇 개월 내에 결혼할 것이다’ 했었는데, 그 당시 남자친구조차 없던 후배는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말 운명인지, 숙명인지 만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결혼을 한 것이다. 그 점쟁이가 내게도 ‘결혼은 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언제”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십 대 후반에는 친구들과 재미로 보러 다녔다. 딱히 궁금하거나 답답한 일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른을 넘기면서 ‘언제 결혼하게 될까?’를 물어보기 위해 꽤 많은 점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무렵의 나는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결혼하지 않고 있는 상태가 괜히 초조했다. 뭔가 숙제를 다 하지 못한 학생 같은 마음으로, 언젠가 해치워야 하는, 끝내고 나야 속이 후련할 것 같은, 짐을 떠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남들이 다하니까, 나도 언젠가는 할 거니까 단지 그때가 언제인지 미리 알기만 하면 좀 덜 불안하고 덜 답답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사십을 넘기면서는 뜸하게 다녔다. 특히 아주 ‘용하다’라는 사람에게는 잘 가지 않았다. 팔자에 “남자가 없다”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서.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상처를 굉장히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희망’도 갖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듣게 될까 봐 다니지 않게 되다 보니, 점점 점집에 가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나이를 더 먹었고, ‘결혼’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엄마도 점집을 꽤 오래 다니셨다. 아빠의 회사 문제, 집은 언제, 어디로 이사 가는 것이 좋은지, 우리 형제들은 아프지 않고 건강할 것인지, 뭘 조심해야 하는지, 모두 취직은 하게 될 것인지 등등 궁금하고 답답한 일이 많았던 엄마는 종종 무당집을 가셨다. 어릴 적 동네에 무당이 살았었는데, 그 집에 엄마랑 자주 다녔다. 지금도 그 집 위치가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다. 우리가 다 자라고 엄마도 나이를 드시면서 더 이상 점집에 다니지 않으신다. 가장 최근에 다녀온 점집은 10년 전이다. ‘신들린’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가는지, 1년 전부터 예약해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1년 전 예약할 때는 “하도 용하다니 너 결혼하는 거나 물어보자”라며 가자고 하셨는데, 1년 후에는 사실 딱히 궁금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예약했으니 다녀왔다. 지금 기억에 남는 말은 “큰딸이 부모님과 가깝게 살 거다”라는 말이다. 그 말은 맞춘 것 같다. 지금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으니. 그 외에 여러 가지 얘기를 1시간가량 들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그 얘기다.

     

얼마 전 ‘타로 수비학’ 책을 낸 한민경 저자의 북 토크(book talk)를 다녀왔다. 거기서 생월을 기초로 한 나의 연도 카드를 받아봤다. 그리고 각각의 타로 번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을 들었다. 일종의 ‘신년 운수’처럼 2023년의 내 운명에 대해 듣고 2022년에는 어떤 해였는지를 들었다. 그리고 해당 타로 번호가 있었던 과거의 일을 되짚어 보았는데, 신기하게 맞았다.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던 해에 나는 고3이었고, 이십 대에 뉴질랜드에서 서울로 돌아올 것인지 고민했었고, 삼십 대에는 글만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 회사를 관두고 싶었고, 사십 대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했었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겠지만, 인생의 큰 흐름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작년에 처음으로 내 삶의 방향을 찾았다. 그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가 궁금하고 답답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위해 계획을 세워 잘해왔지만, 내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해도 해결할 수 없었다. 뿌연 안갯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심리 상담을 받고 내 안의 해소되지 않은 욕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 후로 ‘내 인생은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내 운명의 타로 번호 또한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놀랐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른다. 어떤 시련과 어떤 행복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가게 될 것인지는 안다. 나이 들면,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지면, 그동안 살아온 날의 경험으로 미래가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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