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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Dec 25. 2023

별이 쏟아지는 테카포

- 내 마음에 저장 -

퀸스타운 공항으로 마중 나온 사람은 친구네 회사 직원이었다. 외국인이길래 영어로 인사를 건넸더니 유창한 한국어로 답한다. 알고 보니 인천에서 거의 20년을 살았다고 한다. 벤자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인도와 네팔에서도 오래 살아서 4개 국어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거의 동시통역 수준으로. 호주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여러 나라에서 살았단다. 34개국을 다녔는데 코로나 시국에는 몰타에서 살았다고 한다. 숙소로 가는 동안 그의 살아온 얘기를 듣는데 참으로 글로벌(global)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외국 사람 중에는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살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부모, 형제와 떨어져서 본인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형제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살기도 한다. 그들의 선택은 참 자유로워 보이는데 우린 그 거주지에 대한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다. 나로서는 서울을 벗어나기도 힘드니 외국에서 사는 일은 근 20년간 상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십 대 때는 충분히 외국에서 잘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말이다. 회사에 다니고 휴가에 잠깐 여행하고 그렇게 똑같아 보이지만, 다른 매일의 일상에 잡혀 우물 안 개구리로 다시 살고 있었구나 싶었다.     

 

숙소로 가는 길의 하늘은 무척 낮고 구름은 손에 잡힐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낮은 산과 들판, 강이 보였다. 자연 속에 자리 잡은 도시는 작고 예뻤다. 이렇게 자연을 아침, 저녁으로 보며 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로워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벤자민이 말했다. “하루 세끼 먹고사는 건 똑같은데 기왕이면 자연을 보며 살면 좋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자신은 행운아라고 생각한다”라고. 퀸스타운에 도착한 지 불과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자리가 생기고 숙소도 있고 차량도 지원받는다고. 나는 깜짝 놀랐다. 여기서 몇 년은 산 사람인 줄 알았다.     


퀸스타운에서 보낸 첫 밤은 무척 추웠다. 기온은 영하 1도인데, 체감온도는 더했다. 숙소는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어서 살림살이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샤워하는데 찬물이 계속 나와 덜덜 떨며 물만 끼얹고 대충 옷을 마구 껴입었다. 중앙난방이라는데 방이 너무 추웠다. 뉴질랜드는 집집마다 난방시설이 잘되어 있지 않은 곳이 많았던 경험을 떠올리고, 집에서부터 보온 물주머니(hot water bottle)를 들고 갔는데 그게 신의 한 수였다. 보온 물주머니는 뉴질랜드를 여행하는 내내 내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뉴질랜드의 첫날밤은 선 잠을 자느라 피곤했다. 방문이 잠기지 않아 좀 불안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리고 추워서 중간중간 잠을 깼다. 그러다 새벽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뜨니 버스 출발 시간이 겨우 30분 정도 남은 시각이었다. 부랴부랴 세수도 하지 않고 선크림만 바르고 짐을 챙겼다. 벤자민은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곧 출발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숙소가 있는 동네, 이른아침 풍경

테카포 호수(Lake Tekapo)를 가기로 했다. 남극광을 볼 수 있는 곳을 검색하다가 지구에서 가장 까만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문구가 눈을 사로잡았다. 별 관찰을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운이 좋으면 오로라도 볼 수 있는 곳. 꼭 별을 보고 싶었다. 별은 우리나라에서도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면 볼 수 있는데, 굳이 뉴질랜드에서 보고 싶었다. 쏟아질 듯한 별을.    


운전하는 걸 싫어해서 여행지에서 차량을 빌리지 않는다. 대중교통이 쉽지 않은 제주도에 가도 택시로 이동한다. 삼십 대 때는 차량을 빌려서 잘도 다녔는데 이것도 변한 것 중 하나다. 뉴질랜드는 도시 간 이동을 인터시티 버스(Intercity Bus)로 한다. 기차역이 있는 곳이면 기차로도 가능하다. 테카포까지 가는 버스 편을 서울에서 미리 예매했다. 8시 15분 공항 근처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였다. 부랴부랴 벤자민과 함께 터미널로 향했다. 숙소에서 7시 50분쯤 출발했는데 1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서 약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아침 출근 시간이라 좀 막혔다. 겨우겨우 터미널에 도착하니 5분 전이었다. 벤자민은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따뜻한 미트파이(Meat Pie)를 아침으로 사다 준다. 이른 아침부터 데려다줘서 고마운 쪽은 나인데, 그 따뜻한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버스는 제시간에 터미널에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떠났나 하는 걱정에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아직 오지 않았다며 좀 늦어지는 것 같다고 알려준다. 차가워진 손을 따듯한 미트파이에 녹이며 터미널에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스키를 직접 들고 나타난 나이 드신 분들은 스키장으로 가는 버스에 짐을 싣고 있었다. 학생들은 버스에서 내려 환승 버스를 기다렸다. 밀포드사운드로 가는 버스를 타는 관광객도 눈에 띄었다.      


테카포로 가는 버스는 최종 목적지가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다. 퀸스타운에서 7시간 정도 걸리고 테카포까지는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버스가 15분 늦게 출발했다. 승객은 거의 동양사람들이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커플, 혼자 여행 온 듯한 사람,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 그리고 키위(뉴질랜드 사람)로 보이는 사람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중간 휴식지에서 차를 마시고 화장실에서 마주치며 얼굴을 익히게 되면, 그다음 버스 안에서는 뭔가 모를 친밀감이 생긴다. 그러다가 앞에 앉았던 사람이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두리번거리게 된다. 아마 그 사람은 중간 휴게소가 도착지였을 것이다.      

19세기 마을 같은 중간 기착지 / 구름이 멋진 하늘
푸카키 호수, 만년설, 낮은 구름


버스는 크롬웰(Cromwell), 타라(Tarras), 린디스패스(Lindis Pass), 오마라마(Omarama), 트위즐(Twizel), 푸카키 호수(Lake Pukaki)를 지나 테카포에 도착했다. 겨울로 접어든 뉴질랜드 남섬은 차가운 공기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호수, 만년설과 푸른 들판의 양 떼, 젖소가 공존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 버스가 관광버스였다면 사진 찍기 좋은 장소에서 내리라고 멈춰주었을 텐데, 빠르게 지나쳐가는 광경을 놓치기 아쉬웠다.      

테카포로 가는 길의 풍경

12시 조금 넘어 테카포에 도착했다. 1박만 할 예정이기에 유스호스텔(YHA)에 예약을 했다. 나이 들수록 숙소는 좋은 곳에서 자자는 주의지만, 인터넷으로 사진을 보니 그 지역 호텔에 비해 좋아 보였다. 가격은 저렴했고.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가능하다며 객실을 알려준다. 4인 1실 여성 전용 객실이었는데 이미 두 명의 짐이 이층 침대 아래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창가 쪽 침대 윗 칸에 짐을 놓는데 한 명이 들어왔다. 나처럼 오늘 체크인 한 사람이었는데, 낯이 익었다. 알고 보니 퀸스타운에서부터 버스를 같이 타고 온 사람이었다. 한국인 같이 생겼길래 물어보니 부산에서 온 친구였다.


같은 방을 쓰게 된 기념으로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 친구는 취준생으로 본격적으로 회사에 다니기 전에 여행을 온 것이라고 했다. 호주 시드니와 멜버른을 거쳐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유스호스텔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느긋하게 먹으며 여행 중 에피소드와 정보를 나누었다. 20대의 풋풋함이 너무 보기 좋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 점심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그 친구는 한사코 사양했다. 하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점심을 얻어먹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테카포 호수에서 가장 유명한 ‘선한 목자의 교회’를 구경 갔다. 갑자기 여행 동반자가 된 친구와 둘이 서로 사진 찍어주고 산책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국에서라면 처음 보는 사람과 그렇게 함께 다니며 얘기하고 사진을 서로 찍어주진 않았을 것이다. 마치 오래 알던 사람들처럼 포즈도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 얘기하고, 지금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내보이며 얘기를 나누었다. 이름은 물어보지 않았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스쳐 지나는 인연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버스를 같이 타고 같은 숙소, 같은 방에서 묵게 된 인연 또한 평범한 것은 아니니, 그 순간을 감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친구로 인해 테카포 호수에서 찍은 내 모습의 사진이 엄청 많아졌다. 그 친구도 그랬다. “덕분에 사진이 많아졌어요”라고. 테카포 호수에서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여행지에서 만났던 서로가 생각날 것이다. 이름도 모르고 먼 훗날엔 얼굴도 기억나지 않겠지만.      

에머랄드 빛 테카포 호수와 선한목자의 교회, 그리고 자연 속 자유

저녁에는 친구가 소개해 준 가족을 만나 저녁을 같이 먹고 온천장으로 갔다. 그 가족은 오클랜드 사는데 초등학생 딸의 방학을 맞아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차로 퀸스타운까지 여행하는 중이었다. 우연히 친구와 그 가족이 연락되어 마침 테카포로 간 나와 연결이 된 것이다. 그 가족은 중간 기착지인 테카포에서 나를 픽업하여 퀸스타운으로 가기로 했다. 그 가족이 묵는 숙소에 가서 온천장으로 같이 이동했다. 다행히 테카포 지역은 넓지 않아서 내가 묵는 유스호스텔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온천장에서 별 보는 투어(Tekapo Stargazing Tour)는 1부와 2부로 나눠진다. 1부는 온천장 밖에서 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관찰하는 것이다. 별을 더 잘 보기 위해 주변의 불빛은 모두 끈 상태에서 진행한다. 가이드가 하늘을 향해 레이저를 쏘아 설명하려는 별자리를 가리킨다. 그 레이저 빛이 정말 그 별에 가 닿은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마치 칠판에 그림을 그리듯, 까만 하늘에 하얀 레이저 빛이 반짝이는 별을 가리키는 그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남십자성(Southern Cross)을 비롯한 여러 별자리의 위치와 유래를 듣고 망원경으로 확인한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토성과 유성을 본 것이다. 토성은 UFO 같았다. 망원경으로 띠를 두른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게 놀라웠다. 유성은 수시로 떨어졌다. 가이드가 쏜 레이저 빛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유성이 떨어졌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탄성을 내질렀다. 가이드는 설명하다 말고 그 탄성 소리에 놀라 하늘을 다시 봤다. 그 가이드는 유성이 하룻밤에도 오십 번 이상 떨어지는 걸 봤다며 매우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나도 신기할 것 없다는 투로. 그러면서 각자 몇 번이나 유성이 떨어지는 걸 보는지 세어보라고 했다. 유성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비는 건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관광객들이 빨리 소원을 빌라고 서로를 독려했다.      


2부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뜨끈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하늘의 별을 감상하는 시간이다. 깜깜한 밤에 최소한의 조명만 켜 놓은 온천장에 몸을 담그고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이드는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도 오로라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여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오로라를 목격했다며 너무도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불과 4-5초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씨가 아주 맑고 추운 날에 볼 수 있고 테카포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출처: https://tekapostargazing.co.nz/about/ & https://www.skratch.world/post/visiting-the-southern-lig


그날 오로라를 보진 못했다. 대신 은하수(milky way)를 봤다. 유성이 떨어지는 건 다섯 번쯤 봤다. 같이 간 초등학생 아이는 옆에서 계속 유성이 떨어진다고 외쳤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아이 눈에 더 잘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스무 개를 봤다고 했다. 그렇게 신나게 외치다 곧 조용해지더니 졸리다고, 이제 집에 가고 싶다고 칭얼댔다. 그 소리에 맞춰 돌아갈 준비를 했다.   

   

까만 밤하늘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 사진을 찍었지만, 별이 제대로 찍히지 않아 속상했다. 그저 까맣게만 찍힌 하늘. 속상한 마음에 다 지우고 눈에 잘 담아 머릿속에, 마음속에 간직하기로 했다. 어느 날, 테카포에서 본 밤하늘의 별이 기억나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날의 그 감동을 그저 간직하는 것이 최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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