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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Dec 26. 2023

만년설의 아오라키(Aoraki)

-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 -

코로나에 걸려 여행 일정이 틀어지고, ‘테카포 호수는 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가지?’ 하는 생각에 숙소 예약을 미루고 있었다. 정확히는 퀸스타운에서 테카포까지 버스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다. 별 보러 온천장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관람객을 위한 픽업 서비스가 있는지, 택시를 타야 하는지 알아보느라 시간을 좀 보냈다. 언제 가야 할지 일정을 고민하다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투어 관람객을 위한 픽업 서비스는 없었다. 콜택시를 타고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친구가 희소식을 알려줬다. 마침 아는 가족이 차량으로 남섬 종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내 일정과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일정이 잡히자 숙소를 예약했다. 처음엔 시설 좋은 호텔에서 자려고 했는데, 일단 테카포 호수 근처에 호텔이 많지 않았다. 검색 결과로 마음에 든 곳은 하룻밤에 30만 원이 훌쩍 넘었다. 10만 원대 숙소는 시설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문득, 20대 때 애용했던 YHA(Youth Hostel)가 떠올랐다. 대체로 시설이 깨끗하고, 편리했던 기억이었기에 이곳의 유스호스텔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용할 수 있나? 거긴 젊은 사람들만 받아주는 거 아닌가? 회원으로 가입했어야 했던 거 같은데?’ 하면서 사이트를 둘러봤다. 내 일정에 남아있는 방은 4인 1실 여성 전용 객실이었는데 41달러였다. 공용 욕실을 사용하는 게 좀 불편할 것 같았지만, 욕실이 딸린 객실은 이미 다 예약이 차고 없었다. 회원가입은 하지 않아도 되어 보였다. 망설이면서 부킹닷컴(booking.com)에 다시 한번 들어가 봤다. 다른 숙소가 있을까 하고. 그랬더니 거기서도 유스호스텔을 예약할 수 있었다. "와~ 나이 제한 있는 곳이 아니었구나!" YHA 사이트로 얼른 돌아가 예약을 했다.

      

YHA는 진짜 훌륭한 곳이었다. 인터시티 버스가 내리는 곳에서 불과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데다가 테카포 호수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쇼핑센터는 걸어서 5분. 한 방을 같이 쓰게 된 부산 친구와 다음날 먹을 아침거리를 사러 갔다. 과일과 야채를 사다가 문득, 샴푸가 없음을 알았다. 유스호스텔은 세면용품은 다 들고 다녀야 하는 걸 깜빡했다. 수건은 챙겼는데 샴푸, 린스는 챙기지 못했다. 구매한 물건은 방에 두고 식료품은 공용 냉장고에 넣었다. 이름을 잘 적어서. 재미있었다. 여행하면서 이렇게 공용시설을 이용해 보는 게 거의 30년 만이다. 배낭여행을 하는 젊은이가 된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들떴다.

이곳은 2019년에 새로 지은 건물답게, 모든 것이 깨끗했다. 공용 화장실, 샤워실은 말할 것도 없고 식당에 있는 그릇, 식탁, 침대 시트, 이불 모두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2층 휴게실은 호수를 바로 볼 수 있어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창밖을 봤다.      


바다처럼 큰 호수(뉴질랜드에서 열 번째로 큰 호수라고 한다). 눈 부신 햇빛을 받은 호수는 에메랄드 빛이었는데, 해가 좀 기울고 나니 짙은 푸른색을 띠었다. 호수 앞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그 앞을 산책하던 사람들도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불과 이틀 전, 서울에서 더운 여름날에 지쳐 있었는데 여기 겨울 나라에 와 있는 사실이 신비로웠다. 여행은 늘 신비롭다. 매번 할 때마다 느끼지만 그렇다. 이렇게 떠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비행기만 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던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는 일. 그게 필요했던 것이다. 헤어 나오지 못해 자꾸 수렁으로 빠져드는 마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계기를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을 평온한 마음으로 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주름이 펴지는 기분이었다.      

퀸스타운에서 춥게 잤던 첫날밤 때문에, 테카포에서의 밤은 꿀잠이었다. 방 공기가 따뜻하고 이불도 따뜻해서 아주 푹 잤다. 식당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며 또 호수를 봤다. 주변을 돌아보니 역시 젊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외국 사람들이(가족으로 보였다.)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어느 나라 사람인가 속으로 맞춰보고, 호수를 보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아침을 즐겼다.      

다시 퀸스타운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원래는 첫날 그 숙소로 다시 가야 하는데, 따뜻한 호스텔에서 자고 나니 그 추운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예약해 놓은 호텔로 가기 전 하루만 더 신세를 지려고 했는데, YHA에서 하루 더 자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퀸스타운에 있는 YHA에 당일 예약을 했다. 다행히 여성 전용 6인 1실에 욕실 딸린 방이 남아 있었다.     


어제 온천장에 같이 갔던 그 가족을 만나 퀸스타운으로 출발했다. 퀸스타운으로 가는 길에 마운트 쿡(Mt. Cook)에 들리기로 했다. 부부는 초등학생 딸에게 그곳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나도 좋았다. 10년 가까이 여행 일정표에 타이핑만 치던 장소인 마운트 쿡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호주와 뉴질랜드 전문 여행사에서 일할 때 주요 도시와 관광지는 다 가봤다. 그런데 마운트 쿡처럼 못 가본 곳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곳을 가본다고 생각하니 설레었다. 날씨가 좋으면 30분-1시간 코스의 트랙킹 코스도 걸으려고 했는데 눈이 오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눈이 오다가 안 오다가 하더니, 마운트 쿡에 들어섰을 때는 제법 펑펑 내렸다. ‘와~!!! 눈을 보네! 여름 나라에 있다가 겨울로 온 것도 신기한데 눈이라니!’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일행은 우선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마운트 쿡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곳은 허미티지 호텔(Hermitage Hotel)이 거의 유일하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긴 개발이 많이 되지 않았다. 그때도 호텔은 이곳이 유일했는데 지금도 그렇단다. 주변에 일부 숙소들이 있지만,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별로 없다고 한다. 관광객들을 재우기 위해 항상 예약만 넣던 호텔에 직접 와보게 되다니 감개무량했다.      


허미티지 호텔은 1884년에 지어진 호텔로 그간 두 번의 재건축과 증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33세에 에베레스트산을 최초로 등정한 뉴질랜드의 산악인이자 탐험가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점심을 먹은 후, 후커밸리(Hooker Valley) 앞까지 갔지만 빙판길이 되어 걷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사방에 쌓인 눈을 보는 것만으로 힐링되는 것 같았다. 손과 발이 시려 춥고, 내리는 눈 때문에 모자가 다 젖었지만, 즐거웠다. 같이 간 초등학생이 눈밭에 누워 헤엄치고, 가족끼리 눈을 뭉쳐 서로에게 장난 걸며 던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거워져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나도 신나게 뛰어다녔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찰나를 찍어준 사진을 보면 찐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이다.      

짧지만, 신났던 시간을 뒤로하고 푸카키 호수(Lake Pukaki)에 있는 연어를 판매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오클랜드에서 출발한 가족은,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꼭 이곳에 들러 연어를 사겠다고 마음먹었단다. 뉴질랜드 연어를 노르웨이 연어가 따라올 수 없다며 ‘연어부심’을 드러내더니, 그중에서도 이 가게의 연어는 최고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나는 연어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서 정작 현지 사람들은 사지도 못했다고 한다. 혹시 다 팔리고 없는 게 아닐까 걱정을 하며 갔다. 호숫가에 있는 가게는 무척 작았다. 앉아서 먹을 테이블은 없고 다 포장해 가는 곳이었다. 1kg를 주문했다. 뉴질랜드 달러로 62달러. (5만 원도 되지 않는 가격이라니!) 저녁 초대를 받은 집에 들고 가기에 좋은 선물이 되었다.

테카포에서 우연히 만났던 부산 친구처럼, 이 가족도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친구 소개라서 더 친근한 감은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허물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여행의 힘이 아니었을까. 퀸스타운까지 가는 시간에 부부의 인생을 압축해서 들었다. 알고 보니 남자는 내 남동생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심지어 동갑이었다. 어쩌면 그 남자와 동생은 고등학생 시절에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연애 시절부터 결혼까지의 이야기, 결혼 10년 넘어 갖게 된 아이의 소중함에 대해, 얼마 전 남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던 일 등. 내가 주로 듣는 입장이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부부는 절친 집에서 하루 묵을 건데, 그 집으로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뉴질랜드 교민 사회는 좁아서 어차피 내 친구도 다 아는 사람들이니 어색할 것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내겐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노르웨이를 여행할 때도 여행지에서 계속 마주친 사람과 결국 사진까지 같이 찍고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서울에 돌아와 같이 찍은 사진을 메일로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답이 없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몇 개월 후에 답장이 왔었다. 내가 보낸 메일이 이제야 도착했다며. 마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나오는 내용 같다고 했다. 처음엔 메일함을 열어보지 않았거나, 스팸함에 들어가 있는 걸 나중에 발견했거나 등등으로 넘겼는데, 어느 날 그녀가 말한 책 내용이 궁금해져 사서 본 적이 있다. 책을 읽고 나니, 어떤 시스템의 오류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메일이 늦게 갔다고 느꼈다면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행에서 만난 인연으로 책을 알게 되었다. 가끔 그녀는 덴마크에 사는지, 서울에 사는지 궁금하다.


저녁 초대를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갔다. 집주인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을 대하듯 나를 반겨주었다. 왁자지껄하게 즐거운 사람들과 풍성하게 차린 한식 상차림을 앞에 두고 격의 없이 웃었다. 겨우 4일 만에 보는 한식이었는데 반가웠다. 심지어 맛있었다. 갈비찜, 각종 나물 그리고 가져간 연어. 그 싱싱하고 부드럽고 입에서 살살 녹는 연어의 맛은 단연코 여태 먹어본 것 중 최고였다. 지금도 그 맛을 떠올리면 입맛이 다셔진다. 언제 또 먹어볼 수 있을지...     

집주인은 나의 여행목적이 오로라를 보는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얼마 전 집 근처에서 봤다면서 사진을 보여줬다. "아니, 집에서 보셨다고요??"

"저도 처음 봤어요. 날씨가 아주 청명해야 볼 수 있다는데, 그날 예보가 뜨더라고요. 그리고 소리가 우웅우웅 거리길래 얼른 차를 타고 나갔죠.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왜 잘 못 보냐면 다들 잠자느라 그렇다고 했다. 새벽 시간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저녁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 이민 온 지 이제 20년이 넘어간다며 아이들의 고향이자 자신들 삶의 터전인 이곳에서 잘살고 있다는 뿌듯함과 대견함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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