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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Dec 27. 2023

여왕의 마을

-평화를 얻다-

한식으로 거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유스호스텔에 입실하기 위해 일어섰다. 밤 8시까지 체크인하라는 메시지가 있었기에 서둘렀다. 집주인은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셨는데, 그 표정이 오묘했다. 아마도 YHA에서 잔다는 말 때문인 것 같았다. 좀 더 편한 곳에서 지내지 왜 배낭여행 하는 젊은 사람들이 자는 곳에서 자냐는 듯한 표정이다. 나를 좀 불쌍히 여기는 눈빛이었는데, 여행 오기 전 겪은 코로나와 취소료 등등에 대해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가성비 따지며 돈을 아끼려고 호스텔에 예약한 건 맞으니까. 이렇게 혼자 여행하며 호스텔에서 자보는 것도 꽤 괜찮은 경험이라는 것을 전날 알아버렸으므로.

     

퀸스타운에는 YHA가 두 곳 있는데 호숫가 근처에 있는 곳으로 예약했다. 가는 길에 시내를 한번 둘러보는 건 어떠냐고 하여 선뜻 고개를 끄덕였는데, 시내에 가까워지자 차가 막혔다.     


“세상에~ 차가 막히네요!!! 어떻게 토요일 밤인데 막히죠? 아니 가게들은 왜 저렇게 다 불 켜고 영업 중인 거예요? 와~ 저 사람들은 다 뭐래요?”

“하하하. 여기가 관광지잖아요. 관광객들이 많으니 밤늦게까지 하는 곳들이 많아요. 옛날생각 하면 안 돼요. 많이 변했어요.”     


내가 생각한 뉴질랜드는 저녁 5시가 되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거리는 한산해지는 곳이었다. 오래전 와 본 퀸스타운은 아주 시골 같은 곳이었는데,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단다. 겨울에 스키 타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불야성인 시내 한복판을 겨우 빠져나갔다. 8시를 넘길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6인 1실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사람은 없는데 모든 침대에 짐들이 놓여 있었다. 욕실이 딸려있어 움직이기 편리했다. 대충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호스텔 구경을 나섰다. 공용 식당에는 그 시각까지 사람들이 많았다. 음식을 먹거나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거나 그냥 대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설은 테카포 호수에 있는 것만큼은 아니었다. 거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니, 이곳이 좀 낡아 보이는 건 당연했다.


따뜻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탭(tap)이 있어 물을 끓일 필요는 없었다. 텀블러에 물을 따른 후 라운지에 가봤다. 영화를 볼 수 있는 방이 있고 벽난로가 있는 방이 있었다. 다행히 벽난로 앞 소파에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앉아 퀸스타운에서 가볼 곳들을 검색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 인터넷은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만 할 결심을 했었다. 우리나라처럼 잘 되지는 않지만, 웬만한 호텔이나 시설에서는 가능할 것 같았다. 실제로 YHA 와이파이는 좋았다. 공항은 좀 느리고 잘 안되기는 했지만. 그러다 테카포로 가는 날, ‘버스 안에서는 인터넷이 안 되겠네!’ 하는 생각에 미치자, 불안했다. 카톡이 되지 않으면 친구와 연락할 수 없고, 혼자 여행하는데 아무와도 연락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통신사에 들어가 데이터 로밍을 신청했다. 2기가 사용에 무료 33,000원이었다. 서울에서라면 2기가는 택도 없을 양이지만, 여기서는 아껴 쓰면 가능할 것 같았다.      

난 뭘 하나를 사더라도 비교를 한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기능을 가졌는지, 모양이 더 좋은지, 가격은 어떤지 등등을 비교한다. 나름대로 내 마음에 쏙 들면서도 가장 합리적인 가격으로 샀다는 믿음이 생기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굉장히 현명한 소비를 한 기분이다. 항공도 숙소도 그렇게 예약했다. 부킹닷컴(booking.com), 마이리얼트립(my real trip)을 주로 비교하고 해당 항공사나 호텔에 들어가서 프로모션을 하는지도 봤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비교분석 하느라 시간이 꽤 걸린다.      


그런데 데이터 로밍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몇 개 없었다. 그중, 제일 저렴한 게 33,000원이었다. 좀 비싸서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결제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테카포에서 만났던 그 부산 친구는 9,900원에 무제한이라고 했다. 20대가 이용할 수 있는 요금이었단다. ‘흥, 이런 데서 나이 차별이 생기다니!’     

피곤이 몰려와 객실로 돌아갔다. 이곳은 테카포의 YHA보다 더 따뜻했다. 자다가 너무 더워서 양말 벗고 겉옷도 벗고 내복만 입고 잤다. 게다가 겨우 3시간 시차지만, 바이오 리듬 영향을 받은 탓에 화장실을 며칠 못 가고 있었는데 아주 개운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우티(UT) 택시 앱을 이용한다. 해외에 가면 우버(Uber) 앱으로 쓸 수 있다고 하여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첫 탑승자는 50% 할인을 해주고, 10%, 20% 할인쿠폰도 주었다. 택시를 할인받고 다니는 기분이 꽤 좋았다. 해외여행, 출장을 가서 우버를 탄 적이 있지만 내가 직접 불러본 적은 없었다. 항상 같이 갔던 일행들이 불렀었다. YHA에서 체크 아웃하고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우버를 불렀다. 거리상으로는 크게 멀지 않아서 걸어갈까 했으나, 역시 트렁크를 끌고 다니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우티 앱으로 우버를 불렀다. 우선 엄청 편리하다. 몇 분 후에 도착하는지, 어떤 경로로 오고 있는지 보이는 건 카카오택시와 같다. 물론 우티도 그랬지만. 우버는 운전사를 볼 수 있었다. 어떤 나라 사람인지를 비롯하여 간단한 소개가 있었고 그가 받은 평가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걸 한국어로 볼 수 있어 더욱 편리했다. 우버는 아주 짧은 시간(거의 2-3분) 안에 도착했다. 처음 만난 우버 기사는 중국인이었다. 별이 몇 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평이 좋은 사람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우버를 운행하는 사람은 거의 중국인, 인도인이라고 한다. 요금은 11달러 정도였는데 서울과 비교해도 싼 편이었다. 이후, 오클랜드에서도 우버를 몇 번 이용했는데 요금이 착했다.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다면 팁을 주라면서 1, 3, 5달러 중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떴다. 택시 팁을 주는 일이 낯설어서 1달러를 눌렀다. 그러다가 오클랜드에서는 3달러를 눌렀다. 한국인이 손님이었다는 것을 알 테니,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팁을 많이 줄 수는 없었다. 중간이 항상 적당하다. 하하.      

3박을 하게 될 호텔에 짐을 풀었다. 1박짜리 짐을 최대한 간편하게 들고 다니려고 같은 옷을 매일 입었더니, 슬슬 옷 갈아입고 싶던 참이었다. 짐을 다 풀고 어슬렁거리며 시내로 걸어갔다. 택시로 올 때는 거리가 좀 있나 싶었는데, 걸어가 보니 5분 정도 걸렸다. 일요일 아침이라서, 가게 문이 닫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아침 먹을 식당이 있을까 하며 내려갔는데, 웬걸. 어젯밤에 본 것처럼 모든 가게가 영업 중이었다. 카페, 옷가게,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여행사, 인근에서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activity) 판매 회사, 관광안내센터 등 관광객들이 이용할만한 모든 곳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심지어 갤러리도. 문을 닫은 곳은 부동산뿐이었다.      

한글로 안내되어 있는 쓰레기통 / 와카티푸 호수 주변

아침 먹을 식당을 두리번거렸다. 식단 관리까지는 아니지만, 버거나 베이컨, 햄이 들어간 건 먹고 싶지 않았다. 채소 위주로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느라 레스토랑 앞에 놓여 있는 메뉴판을 일일이 보면서 다녔다. 마침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쓰여 있는 걸 보고 무작정 그 식당으로 들어갔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야채 위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파인 다이닝까지는 아니었지만, 정말 캐주얼한 분위기도 아닌 곳이었다. 뉴질랜드스러운 클래식함이 느껴지는 레스토랑이었다. 테이블은 원목으로 따뜻한 브라운색이고, 의자는 짙은 브라운색의 가죽이었다. 웨이터는 나를 안쪽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안쪽에는 한 무리의 남성 손님들이 다섯 명쯤 앉아 있었고 내 옆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대각선 쪽 테이블에는 커플이 앉아 있었다.


웨이터가 자리를 안내하고 주문받으러 오는 시간이 좀 걸렸다. 뉴질랜드는 아니 서양권 문화는 좀 느린 부분이 있어서 별생각 없이 기다리며 메뉴판을 이리보고 저리 보고 했다. 그런데 바로 맞은편에 어린아이 2명과 부부를 안내한 웨이터는 그 가족의 주문 먼저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휑하니 가버렸다. 기분이 나빠졌다. ‘동양인이라고 얕보나?’ 하는 마음에 더 상했다. 좀 있다가는 내 옆 빈 테이블에 손님들을 안내했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주문하겠다고 하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곧바로 필기구를 들고 나타났다.      


메뉴판을 가리키며 오늘은 무슨 수프냐고 했다. 그는 토마토 스프라고 답했다. 토마토는 몇 년 전부터 좋아진 채소다. 맛이 없어서 좋아하지 않았는데, 몸에 좋다고 하여 먹다 보니 맛있어졌다. 특히 토마토 수프를 좋아한다. 회사 근처에 토마토 스튜를 파는 빵집이 있는데 단언컨대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맛있는 스튜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입에는 그 집 스튜가 어느 최고급 레스토랑의 스튜보다 맛있다. 양이 좀 많다 싶었지만,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토마토 수프와 채식주의자용 아침 세트(vegetarian breakfast set)를 주문했다.

그런데 내 표정이 못마땅하다는 표시를 하고 있었던지, 그는 맞은편에 아이가 있어서 주문을 먼저 받았다고 설명을 했다. 아이가 배고파할 것 같아서 먼저 주문을 받았다고. 순간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얼굴이 좀 빨개진 것도 같다. 코로나 시국에 아시안을 차별한다는 뉴스를 많이 봐서 그랬던 것일까, 괜한 피해의식에 웨이터만 나쁜 사람 만들 뻔했다.      


주문을 하고 나자, 그제야 레스토랑에 울려 퍼지는 음악이 들렸다. 주로 80년, 90년대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10대와 20대 시절에 들었던 감성 어린 팝송이 귀에 콕콕 들어왔다. 왓츠업(what’s up)의 후렴구  왓츠고잉온(what’s going on)을 입맛 벙긋벙긋 따라 부르며 몸을 흔들흔들거렸다. 흥얼거리자니 신이 났다. 아무 생각 없이 온전히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음악에 맞추어 고개를 까딱이며 몸을 좌우로 움직였다. 왓츠업 다음에는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의 스턱온유(stuck on you) 노래가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쭉 흘러내렸다. “엇!” 당황스러웠다. 가사가 마음을 울린 게 아니었다. 가사는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스턱온유라고 하는 것만 선명하게 들릴 뿐. 멜로디가 익숙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이유를 모르겠는데 눈물이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서 냅킨으로 얼른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참을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아~ 그래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다. 오롯이 나한테만 집중하면서. 이것만으로도 이런 행복감을 느끼는데, 왜 그렇게 날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지?!’ 서울에서 아무것도 어쩌지 못한다는 무기력감에 힘들었는데, 그 환경이 너무, 너무 싫었는데 이렇게 간단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불과 며칠 상관으로 마음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울고 났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와 꼭꼭 씹어 먹었다. 아주 천천히.


웨이터에게 음식을 너무 많이 시킨 것 같다고 했더니, 남으면 싸가면 된단다. 즐기며 먹으라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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