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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Dec 28. 2023

금광마을, 화살마을

- 느긋한 시간 -


퀸스타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척 낮고 가깝게 느껴지는 산. 산 봉우리에는 눈이 쌓여있는데 가끔 구름과 헷갈린다. 뉴질랜드의 하늘과 구름은 유독 낮게 느껴진다. 손에 잡힐 것처럼. 구름의 모양도 특이하다. 마치 해일이 덮쳐오는 듯한 모양의 구름이 있는가 하면, 신이 마구 휘저은 듯 사방으로 흩어진 구름이 있다. 이쪽 편의 구름은 먹구름인데 반대편의 구름은 쨍하다. 그래서 뉴질랜드를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고 하나보다.      

산은 언뜻 보면 민둥산 같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다. 바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산은 나무로 무성하다. 정상에 눈이 쌓여있지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다.      

호텔이 언덕 위에 있어서 시내로 내려가는 삼거리쯤에서, 한눈에 180도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왼편으로는 와카티푸 호수가 보이고 맞은편에는 야트막한 산이 보인다. (이름은 모르겠다.) 오른편으로는 호텔들이 죽 늘어서 있는데 그 너머로 퀸스타운 힐(Queenstown Hill)이 보인다. 그런데 맞은편 산 모양이 좀 이상했다. 자연재해를 만난 듯 나무들이 쓰러져있고 파헤쳐진 모습이었다. 왜 그런가 하고 선글라스를 벗고 안경을 썼다. 그래도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카메라로 줌을 해봤다. 그랬더니 곤돌라가 오가는 길이었다.      


실망스러웠다. 퀸스타운의 곤돌라는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모든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 중의 하나다. 산꼭대기에서 식사를 하며 멋진 전경을 볼 수 있고, 루지(luge)를 탈 수도 있다. 로토루아((Rotorua)에도 같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곤돌라가 있다. 북섬과 남섬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 이 곤돌라 상품을 열심히 팔고 보여줬는데 실상이 이랬다니. 그때는 몰랐다. 그때도 이랬나? 이렇게 산을 파헤치고 관리 안 한 모습이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20-30대 시절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이 훼손된 것을. 멀리서 보니 그 흉측함이 더했다. 뒷마무리가 이렇게 허술해 보일 수 있을까? 내가 아는 뉴질랜드는 그런 곳이 아니었는데.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가 오클랜드로 올라가는 날이다. 첫날은 오후 늦게 도착해서 구경이랄 것 없이 저녁 먹고 얘기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우리 둘은 예쁜 마을에 가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퀸스타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애로우타운(Arrowtown)은 19세기 건물이 남아있고 그 시절의 정서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었다. 1862년 골드러시(Gold Rush) 때 금을 캐러 사람들이 몰려오며 형성된 지역이라고 한다. 애로우타운이라는 이름은 애로우강(Arrow River)에서 따왔는데, 강 물살이 빠르고 애로우와 부쉬 개울(Bush creeks)의 합류점이 화살촉 모양이어서 그렇다는 유래가 있다. 혹자는 금 캐러 왔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쑥 빠져나가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유래야 어찌 되었든, 이름이 재미있다. 화살마을. 인생 역전을 꿈꿨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몰려간 마을. 화살처럼 빠르게 이해타산을 따지며 오고 간 사람들. 그런데 그 흔적은 21세기 지금까지 남아,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마을이 되었다. 아이러니하다.      

19세 사람들이 묵었을 호텔, 그 시절 마을 사람들이 이용했을 법한 우체국. 금광을 캐던 마을답게 금으로 만든 액세서리 가게가 많다. 반지, 귀걸이, 팔찌, 목걸이, 브로치 등 그 모양은 투박한데 순도 100%가 넘는, 진짜 금, 금, 금으로만 만든 것으로 보였다.      


우체국에는 이런 말이 유리창에 붙어 있었는데, 우체국에 왜 이런 말이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남편과 쇼핑을 하는 것은, 게임 감시인과 함께 사냥하는 것과 같다” 우체국에서 물건을 파는 것 같기는 했다.     

남섬에는 뉴질랜드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저트 가게가 있다고 한다. 퀸스타운에서 꼭 먹어보라는 가게였는데 시내에서 보긴 봤지만, 들어갈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데 여기 애로우타운에서 그 가게가 떡하니 눈에 들어왔다. 중심 거리 뒤편에 자리하고 있어서 하마터면 발견 못 할 뻔했다. 애로우강에서 사금 채취하는 체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여 갔다가 휑한 바람에 머리만 엉망으로 날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파타고니아(Patagonia) 가게. 검색해 보니, 뉴질랜드 북섬에는 있지 않은, 남섬에만 있는 가게였다. 퀸스타운, 애로우타운, 와나카(wanaka) 지역 딱 세 군데만 있는 곳이었다. 그 희귀함에 가게에 대한 호감이 상승했다. 거기서 파는 모든 디저트가 다 맛있어 보였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침 배가 고팠기에 욕심껏 시켰다. 먹기만 하는 건 아까워서 선물용으로 살 수 있는 초콜릿도 샀다. 그런데 간과한 것이 있었다. 여기 조각 케이크는 서울의 그것과 사이즈가 다르다는 것을. 두 배는 크고 세 배는 달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너무 달아서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베이글과 서울에서 먹기 힘든 라즈베리(Raspberry) 초콜릿 케이크만 겨우, 겨우 다 먹고 치즈 케이크는 남길 수밖에 없었다.     


친구와 둘이 카모마일(camomile) 차(tea)로 속을 안정시키며 멍하니 창밖을 보고, 가게 안을 오가는 사람을 봤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겨울날의 추운 몸을 녹여줬다. 따뜻했다. 몸도 마음도 풍경도.      

점심은 친구가 꼭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라며 데려갔다. 밀브룩 리조트(Millbrook Resort)에 있는 카페 “홀인원(hole in One)”이었다.     

 

“어머, 여기 밀브룩 리조트야?”

“여기 알아?”

“그럼~~ 내가 맨날 일정표 치던 곳이잖아. 여기 골프장이 유명해서, 골프 치러 오는 손님들 있으면 예약해 줬는데! 이곳을 이제 와보네~”     


그랬다. 이번 여행에서 2-30대에 모니터 속 글자로만 보던 곳을 이십 년이 지난 후에 발을 디딘 곳이 많았다. 테카포, 마운트 쿡, TSS Earnslow, 월터피크 농장, 애로우타운 그리고 여기 밀브룩 리조트.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여기가 꽤 새로 지은 리조트였는데... 어? 카페 지붕이 양철지붕이야! 일부러 이렇게 해놓은 거겠지? 옛날 느낌 나게? 음... 그래도 녹슬어 보이는 건 좀 별로인데...”     


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알거렸다. 5성급 호텔에다 그린피(green fee)가 꽤 비싼 곳이어서 럭셔리 상품으로 팔던 곳이다. 그 시절에 한 번쯤 와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고, 십 년 넘게 타이핑 치던 곳의 지명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흘러 그때 그런 소원을 했는지도 다 잊었었다. 그랬는데, 기억이 마구 되살아났다.     


나중에 여기 올 기회가 또 있다면 한번 자봐야겠다고 했더니, 친구가 “오면 되지!” 하면서 “이렇게 같이 다니니까 좋다. 은퇴하고 같이 놀러 다니자~”라고 했다. 맞다. 오면 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혼자서도 여전히, 충분히 잘 다닐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니 오면 된다. 친구랑 놀러 다닐 수 있다.     


친구가 퀸스타운에 다녀온다고 했더니 딸이 “퍼그 버거”를 사 오라고 했단다. 그렇지 않아도, 퀸스타운 검색하면 꼭 먹어봐야 하는 버거로 나오길래 궁금했었다. 첫날 혼자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그 버거집 앞에 장사진을 친 사람들을 보고 사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 곳이었다. 아침에 가도, 점심에 가도 줄이 엄청났다. 그런데, 전화로 주문할 수 있단다. ‘헐!’      


친구가 내 몫의 버거를 전해주고 공항으로 갔다. 열 개쯤 되는 버거를 두 손에 들고. 혼자 보내는 조용한 저녁 시간이었다. 휴대폰으로 음악을 켜고 일기장을 집었다. 여행할 때마다 들고 다니는 일기장. 매일 쓰진 못해도, 최소한 여행 중에는 매일 쓰려고 노력하는 일기.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정리하지 않고 흘려버리면, 계속 못다 한 숙제가 남아있는 것 같다. 마음이 무겁고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하다. 일기장에 의식의 흐름대로 그냥 써내려 가다 보면 마음이 개운해진다. 뭔가 정리한 기분이다. 어떤 것을 결심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그냥 홀가분해진다. 이것도 병인가 싶을 때가 있다. 되지도 않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일들이.    

  

퍼그버거는 맛있었지만, 너무 컸다. 다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줄을 서서 먹고 싶을 만큼의 맛은 아니었다. (배가 고팠다면 더 맛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광지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버거를 먹어봤으니 만족스럽다. 맛과 상관없이 안 먹어봤다면 그건 그대로 서운할 뻔했다. 남들이 하는 걸 꼭 해봐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지만, 또 일부러 안 할 필요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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