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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Dec 30. 2023

낯설지 않은 오클랜드

- 나름 파란만장 -

친구가 오클랜드 공항으로 마중 나와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엡솜(Epsom) 지역에 사는 친구의 집은 근사했다. 거실 바닥에 카펫이 아닌 나무가 깔려 있어서 한국식 같은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바닥이 따뜻해서 좋았다. 며칠 만에 또 한식으로 저녁 먹고, 친구 집을 구경한 후에 호텔에 투숙했다.   

오클랜드에서 숙소를 찾을 때, 시내에 위치하여 걸어 다닐 수 있고,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묵고 싶어 그에 딱 맞는 한 호텔을 예약했다. 그런데 그 호텔의 일부 구간이 홍수 피해로 복구 중이어서 좀 시끄러울 수 있다는 메일이 왔다. 이용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시끄러운 건 싫었기에 취소하고 그 근처 다른 호텔에 예약했다. 호텔은 앞에 신호등만 건너면, 바로 비아덕트 하버(Viaduct harbour)로 갈 수 있고, 뒤편으로는 시내로 걸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체크인할 때 직원이 5일간 머무르니 아침 식사 할인 쿠폰을 주겠다고 했다. 원래 44달러인데 39달러에 먹을 수 있는 쿠폰이었다.      


“이 쿠폰은 1회만 쓸 수 있는 거예요? 매일 아침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쿠폰이 더 필요한가요?”     


직원은 내 질문에 머뭇거리며 쿠폰에 적혀있는 문구를 이리저리 보더니만, 이거로 5일 내내 쓸 수 있다고 했다. 프런트에 있는 직원은 친절하려고 애썼다. 오클랜드에 와 본 적 있는지, 언제 살았었는지 등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을 하고, 디파짓(Deposit)을 위해 내민 카드가 너무 예쁘다는 등의 얘기를 했다. 손님의 기분을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사회 초년생인가 싶기도 하고, 뭐라도 말을 걸어서 친근함을 표시하려는 마음이 갸륵해서 같이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침대 위에 호텔 직원들이 친필 서명한 웰컴 카드(Welcome Card)가 놓여있었다. 아마도 5박을 하는 손님이라 놓은 것 같았다. 느릿느릿 짐을 풀고 창밖을 보다가 별로 흥미롭지 않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딱히 한 일 없이 퀸스타운에서 비행기 타고 오클랜드에 온 게 전부인데, 피곤했다. 씻어야 하는데 귀찮아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를 닦으며 물을 틀었는데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단수될 때 나는 소리가 나면서 찔끔 나오더니 안 나왔다. 당황해서 생수로 대충 입을 헹구고 프런트에 전화했다. 직원은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공사할 일이 있어 단수된다면서 체크인할 때 못 들었냐고 물어봤다. 8시쯤 체크인했는데 전혀 듣지 못했다고 했더니, 이상하다면서, 체크인할 때 항상 안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쇄물도 못 받았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정말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지금으로서는 물이 나오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단다. 너무 황당했다. 전화를 끊고 멍하게 있다가 다시 프런트에 전화했다. 생수라도 몇 병 갖다 달라고 했다. 얼굴이라도 씻어야겠다고. 직원은 알겠다면서 몇 병이 필요하냐고 물어봤다. ‘아니, 몇 병이 필요할지는 직원이 알아서 챙겨줘야 하는 게 아냐?’라는 생각을 하면서 방 안을 둘러봤다. 이미 놓여있는 생수가 냉장고 위에 2병이 있었다. 넉넉히 받자는 생각에, 3병을 보내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아, 들어오자마자 씻을걸. 너무 시간을 허비했어’하며 반성했다. 그리고 ‘그 친절하려고 애쓰던 직원은 왜 그리 어리바리했던 거야?’라며 좀 짜증이 났다.      

조금 기다렸더니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문 앞에 생수가 도착했으니 문을 열고 가져가라”는 기계음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을 열었더니 로봇이 서 있었다. 화면에 버튼을 누르라고 되어 있어서 눌렀다. 로봇의 가슴이 열리며 생수가 보였다. 생수를 집어 들고 다시 버튼을 누르니 가슴이 닫히며 복도를 향해 돌아섰다. “신기하네~ 코로나 이후로 정말 많은 것이 변했구나.”  비대면을 선호하는 시대가 되어 하우스키퍼(housekeeper) 일이 줄어든 것이다. 사람 채용할 일도 줄었겠지 싶었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뉴스 검색을 해봤다. 친구가 호텔로 데려다주며 1월에 큰 홍수가 났었는데 사람이 죽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홍수는 처음 겪어 봤단다. 그때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알게 되었단다. 도로가 다 잠기고 동네마다 배수가 잘되지 않아 물이 넘치는 곳이 많았단다. 특히 시내가 잠겼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곳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을 매매할 때 홍수 피해가 났던 지역인지, 앞으로 위험지역인지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클랜드 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홍수가 났던 지역, 위험지역이 지도로 표시되었다. 내가 지금 묵고 있던 호텔도 홍수 피해가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단수를 하고 뭔가 공사를 하는 것인가?”     

 

다음날 아침, 수돗물이 나왔다. 어렸을 적 단수된 뒤에 나오는 물은 녹물이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더운물 찬물 수도꼭지 방향을 바꿔가며 틀어 보았다. 다행히 맑은 물이었다. 뷔페를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쿠폰을 보여줬더니 직원이 가져가려고 하길래 물어봤다.      


"내일 아침도 먹을 건데, 이 쿠폰 없어도 할인받을 수 있어요?"

"새로운 할인 쿠폰이 있어야 해요."

"그래요? 어제 체크인할 때는 이거 하나면 된다고 했는데요?"

"아, 그랬어요? 제가 확인해 볼게요"     


직원은 프런트에 다녀온 듯, 쿠폰 하나를 새로 주며 말했다.

"쿠폰은 한 장씩 써야 한대요. 이건 내일 아침에 쓰시면 돼요."

"미리 4장을 받을 수 없을까요? "

"음.. 내일 아침에 말씀하시면 드릴게요"

그 친절하기만 했던 직원은 이것도 엉터리로 알려준 셈이었다.     

 

호텔에서 아침 먹는 걸 좋아한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는 게 기분 좋기 때문이다. 친구, 가족과 함께 여행할 때도 이런 아침 시간을 즐긴다. 그저 먹고 얘기만 했는데 1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평소 아침 먹는 시간은 십 분도 채 되지 않게 후다닥 먹고 출근하는데, 쫓기지 않는 마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는 즐거움은 여행 중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아침 먹고 방에 들어오자 전화벨이 울렸다. 어젯밤 직원이 공지를 제대로 하지 않아 불편을 겪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원하는 서비스가 있냐고 해서 없다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끊고 나니 '방값을 할인해 달라 할 걸 그랬나?, 아침 할인을 더 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항상 이런 경우엔 요구사항이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잘 요구하지도 못한다. 식당에서 머리카락 같은 불순물이 나와도 그냥 조용히 빼고 먹는다. 어떤 경우엔 직원을 조용히 불러 보여준다. 식당에서 미안하다고 음식값을 빼주거나 음료를 서비스로 주는 등 먼저 미안함을 표시하는 경우는 그 사과를 받는다. 하지만 먼저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말을 하기가 참 쉽지 않다. 낯간지럽기도 하다. 손님의 권리로 당당히 요구해도 되지만, 나도 서비스업에 종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관광 안내소에서 일하는 어떤 분이 그 일을 하면서 느낀 소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내가 그간 진상 짓을 많이 했구나."라고 느꼈다며, 지금 그걸 벌로 받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남의 행동으로 알기가 어려운데, 그걸 깨닫다니 놀랍고 멋져 보였던 기억이 있다.     


오후 늦게 친구 집을 가기 위해 시내로 걸어갔다. 친구는 매일 저녁 누구와 무엇을 먹을 건지 계획을 다 세워놨다. 하루도 빠짐없이 계획을 세웠길래, 주말은 쉬자고 했다. 어차피 월요일에 또 같이 여행 갈건대, 너도 좀 쉬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친구는 퀸스타운을 다녀온 후로 감기 기운이 있다고 콜록댔다. 처음엔 '나한테 코로나가 옮았나?' 걱정했는데, 전파력이 없을 때 만났기에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었다. 너 말대로 난 독립적인 사람이니 혼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너희 집도 잘 찾아갈 테니 주소만 알려달라고 했다. 그랬는데 뉴마켓(New Market)까지 기차 타고 오면 픽업을 하겠다고 했다. 내심 '우버 타면 편할 텐데' 싶었다. 친구는 그 속내를 알았는지 "택시 타지 말고 여기까지 왔으니 기차 타고 버스 타."라고 하면서 구경삼아 다니라고 했다.     


뉴마켓에 새로 생긴 웨스트필드 쇼핑센터(westfield shopping center)가 있는데, 요즘 오클랜드에서 가장 핫하다고 했다. 그 쇼핑센터 때문에 상권이 살아났다고 한다. 거기 구경하고 있으면 픽업하겠다고 스케줄도 짜줬다.      


뉴마켓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브리토마트(Britomart)라는 기차역이 항구 앞에 있었다. 이곳에 살 때는 없던 빌딩이다. 그 빌딩을 보고도 기차역인지 몰라서, 주변을 좀 헤맨 후에 기차역임을 알아봤다. 그 시절엔 오클랜드에 기차가 없었다.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아서 시간표를 보고 타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버스 정류장에 곳곳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있고, 몇 분 후에 오는지 우리나라처럼 알려주는 전광판이 있다. 기차는 우리나라 전철처럼 동네를 이어주고 있었는데 노선이 많지는 않았다.     

발권 기기 앞에서 편도 표를 끊었다. 기차값은 4달러. (한화 약 3,200원.) 우리나라 보다 비싸다. 뉴마켓에 내려서 쇼핑센터까지 좀 걸었다. 쇼핑몰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곳이었다. 예전만큼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다만, 화장품 편집 가게에서 설화수를 보고 반가웠다. 그리고 차(tea)를 파는 가게 이름이 독특해서 눈에 띄었다. “tea talk” 왜 그런지 한국 사람이 지었을 것 같은 가게 이름이었다. 요즘 서울에도 커피 전문점 못지않게 차 전문점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름들이 하나 같이 예쁘고, 이름만큼 가게도 예쁘다. 쇼핑센터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이 가게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이름이 눈에 띄어 발길을 잠시 멈추었다.   

친구 집에는 혼자 사는 싱글 여자들이 모였다. 친구가 나를 위해 일부러 그렇게 구성했다. 40대 후반 늦은 나이에 유학 와 올해 박사 학위를 받는 분, 돌싱으로 열심히 사는 분, 북한 탈주민으로 이민 온 분 등 모두 처음 보는 분들과 처음이 아닌 듯 수다를 떨었다. 우리를 골드미스라고 칭한 친구에게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했다. 골드미스는 이미 예전에 쓰던 말로, 삼십 대 결혼 안 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럼 실버미스 들인가?”라는 친구 말에 손사래를 쳤다. 실버는 너무 늙은 느낌을 주어 슬프게 만들었다. 누군가 "골드 앤트(Gold Aunt)인가?"라고 했는데 그 말이 더 타당하게 들렸다.    

 

친구 남편은 저녁 메뉴인 월남쌈만 같이 먹고 어느새인가 자리를 뜨고 없었다. 여자들의 수다에 낄 수 없었을 것이다. 친구 딸도 같이 저녁을 먹고 조용히 자기 방에 들어갔다. 친구 집에서 연속으로 이틀 저녁을 먹고, 모임 멤버 중 한 분이 호텔까지 데려다 주어 편하게 왔다.

     

밤 10시경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서울에서 재난문자 올 때 나는 소리와 똑같았다. 깜짝 놀라서 문자를 봤더니, 시내에 가스가 새어 통제했던 상황이 이제 풀렸으니 복귀해도 된다는 문자였다. 침대를 박차고 창문으로 갔다. 밖을 두리번거렸지만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얼른 뉴스 검색을 했다. 5시쯤 가스가 새서 그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호텔에서 불과 도보로 3-4분 거리에 있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세상에. 큰일 날 뻔했구나. 아, 그런데 5시 통제상황부터 알려줬어야 했던 거 아닌가? 어? 근데 난 외국인인데 나한테까지 문자가 왔네?" 이러면서, 뉴질랜드가 외국인에게까지 친절하게 문자를 해주어 신통하다는 생각을 함께 했다.     


나름, 파란만장한 오클랜드의 첫날과 이틀째 밤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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