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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Dec 31. 2023

느리고 여유로운 하루

- 도시의 양면 -

아침을 먹고 바로 호텔 밖으로 나섰다. 옛 기억을 더듬어 파넬(Parnell)까지 걸어볼 생각이었다. 시내는 공사 중인 곳이 많아 어수선했고 통행을 막은 곳도 있었다. 중심 거리인 퀸스트리트(Queen Street) 양옆 한 블록 뒤쪽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떤 곳은 너무 한산해서 음침하기까지 했다. 걸으면서 괜히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 살 때는 느껴보지 못한 ‘우범지대’ 느낌이 났다. 도시가 바뀐 건지 내 마음이 바뀐 건지 알 수 없었다. 서둘러 그 길을 벗어나면 번화가가 나오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어퍼(upper) 퀸스트리트는 슬럼화가 되어가는 분위기였다. 30년 전에는 이곳이 가장 핫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옛날의 명성으로만 남은 듯 빈 가게들이 보였다. 사람도 달랐다. 어퍼에는 동양인(주로 중국인, 인도인 등)들이 많이 보였고, 항구 쪽인 로우어(lower)에는 키위(Kiwi, 뉴질랜드 사람을 일컫는 말)들이 많이 보였다. 명품 가게도 아래쪽에 포진해 있었다. 퀸스트리트는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걷는 아주 짧은 거리다. 그런데 이 짧은 거리에서 계층이 나뉜 걸 볼 수 있었다.     

이십 대 때 일했던 건물에 가봤다. 그런데 헷갈렸다. 성당은 그대로인데 그 왼쪽으로 3개의 건물 중 일했던 건물은 어떤 것이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근무하던 건물 옆 빌딩 1층에 중국식 볶음밥을 포장했던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 대신 다른 건물이 들어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델리가 있었는데 그 건물도 없어지고 공사 중이었다. 빌딩 건너편에서 세 건물을 번갈아 가며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어떤 건물에서 일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오클랜드 대학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클랜드 대학 건물 앞에서 구글 지도를 켰다. 기억만으로 찾아가고 싶었는데, 길이 달라진 건지 방향을 확인해야 했다. 도메인(Domain)은 전쟁기념관이 있고 탁 트인 공원, 호수 등이 있는 곳이다. 기억에는 길만 건너면 되었는데, 차가 쌩쌩 다니는 고속도로 너머에 있는 것이다. 난감했지만, 여러 차례 나누어 건널 수 있는 신호등이 있어 다행이었다.      


비 오는 날, 도메인을 무작정 걸었던 적이 있다. 그날 무척 우울했던 날이다. 일하지 않고 걸었으니 아마도 주말이었을 것이다. 걷다가 비를 만나 우산도 없이 걸었는데, 정자가 하나 있어 그곳에서 비를 피했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 정자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눈부시게 화창한 날에 보는 정자는 과거와 달리 예뻐 보였다. 기억 속 그곳은 우중충한 곳이었는데 말이다. 행복한 기억은 아니지만,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 아직 남아있는 건 괜찮은 것 같다. 다시 본 곳은 너무 예쁘고 아름다웠다. 이 기억으로 비 오던 날의 기억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기념관 빌딩의 위용은 예전 그대로 웅장했다. 초록빛 잔디 위에 우뚝 서있는 건물은 어떻게 보면 황량해 보일 수 있지만, 그날의 날씨가 너무 맑고 따사로운 탓인지, 고대 로마시대 건물처럼 멋져 보였다. 전쟁기념관 앞에는 가슴이 탁 트이는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앞에 한동안 앉아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과 초원을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는 걸 감지하지 못할 만큼 자연풍경이 아름다웠다.      


파넬거리는 도메인과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19세기에 지어진 듯한 건물이 아직 남아있고 작고 아기자기한 예쁜 가게들이 많은 곳이다. 갤러리, 카페, 레스토랑이 주로 있고 저녁엔 술집도 몇 군데 있던 곳이다. 그런데 그 가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공사 중인 곳이 많았고, 건물 뒤편에 몇몇 팬시한 가게들이 있었지만, 그 숫자가 예전만 못했다. 파넬에서 예쁜 카페에 앉아 차를 한 잔 하려고 했는데, 그럴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거리는 낡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품격과 멋짐을 장착했던 곳인데, 여기도 개발에 밀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아쉬웠다.    

실망한 마음을 안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걸어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안내판을 따라 기차역을 찾아 가는데, 안내판 설치를 헷갈리게 해 놓은 곳이 있어서 같은 곳을 두 바퀴 돈 후에야 구글 지도의 도움을 얻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기차역이 무척 외진 곳에 있었다. 빌라처럼 보이는 건물을 뒤로하고 저 앞에 플랫폼이 보였다. 그 플랫폼까지 가는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터에 공사 폐기물, 쓰레기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걷기 무서운 곳이었는데 ‘대낮이라 괜찮을 거야’라고 다짐하며 갔다. 역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의 작은 건물은 대합실 정도의 크기였다. 발권 기기 앞에서 신용카드로 구입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괜히 초조해서 그랬는지 버튼을 몇 번 잘 못 눌렀다. 보다 못한 역무원이 슬그머니 오더니 도와주었다. 시내 방향 플랫폼은 여기가 아니고 뒤쪽에 있다면서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그 플랫폼까지 가는 길도 외진 곳이었다. 밤에는 절대 걸을 수 없는 곳이었다.

파넬 기차역 플랫폼 가는길

그제야, 어제 뉴마켓행 기차를 탔을 때 들리던 안내방송이 이해되었다. 파넬역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으니 뉴마켓에서 내릴 것을 추천한다는 안내방송이었다. ‘무슨 말인가?’ 의아했는데, 이런 이유였다.  


브리토마트 역에 내려 비아덕트 하버로 갔다. 바다를 메꾸어 만든 항구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답게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부터 캐주얼한 술집, 카페, 식당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침 배가 고파 어떤 메뉴들이 있는지, 레스토랑 앞에 펼쳐져 있는 메뉴판을 보면서 다녔다. 그런데 한식당은 아닌데 불고기, 김치버거가 있는 식당이 있었다. 뉴질랜드에 한식 열풍이 불고 있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하긴 묵고 있는 호텔 내 식당에서도 한국식 치킨이 메뉴판에 올라 있었다.      

너무 비싼 곳을 피해 적당한 가격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2층에 있어 항구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면서 화이트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감자튀김을 시켰다. 역시 이곳은 양이 많다. 그 많은 감자튀김을 하나씩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항구에 묵여있는 요트를 보고, 내 옆의 커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있는 모습을 감상했다. 레스토랑 안에는 회사원인 듯한 한 무리의 키위들이 있었는데, 대낮에 와인, 맥주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 그들의 정체가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탓에 와인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감자튀김을 다 먹고 올리브로 만든 치아바타를 시켰다. 와인을 먹다 보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추웠다. 이제 그만 갈까, 자리를 옮겨달라고 할까 망설이는데 웨이트리스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창문을 닫아 주었다.

     

“훨씬 낫죠?”라며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혼자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아님, 양이 많은 감자튀김과 치아바타를 혼자 다 먹겠다고 시킨 사람이라 눈여겨봤던 것일까. 뭐, 아무렴 어떤가. 나를 불쌍히 봤든, 식탐이 많은 사람으로 봤든 세심하게 챙겨준 건 고마워할 일이다.     

결국 치아바타는 포장해서 방으로 돌아왔다.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한바탕 한 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하여 음악을 들었다. 스르르 마음이 이완되었다. 이어폰으로 듣지 않고 스피커에 연결해서 듣는 음악. 그 다른 감흥이 몸으로 전해졌다.      

호텔 객실에서 본 비아덕트 하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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