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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Jan 02. 2024

가만히 있는 것도 여행

- 게으름 피어도 좋아 -

새벽에 눈이 떠졌다. 가끔 이런다. 새벽에 잠이 깨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을 때가 있다. 눈뜨고 멍하니 누워 천장을 보다가 창밖을 봤다. 하늘이 회색과 붉고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오른쪽 바다 수평선이 붉게 물드고 있었다. 시간이 점점 흐르자 거리가 밝아져서 해가 뜬 줄 알았다. 그런데 수평선 주변의 색이 주황색, 붉은색으로 변하며 하늘까지 붉어지더니 노랗고 하얀빛의 해가 불쑥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너무 부셔서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얼른 선글라스를 찾아 끼고 사진을 찍었다. 태양의 일부가 구름에 가려졌는데도 빛이 강했다. 선글라스를 뚫고 들어오는 빛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태양이 솟아오르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가슴이 벅차고 이 감동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었는데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와~ 놀랍네, 놀라워. 내가 그동안 본 건 일출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솟아오르는 걸 본 기억이 없어~”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잘 찍지 않는다. 한데, 이번 여행에서 사진만으로는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워 동영상을 몇 번 찍었다. 그래서 일출 모습도 동영상을 찍었는데 찍고 보니 20분이었다. 누군가에게 보내기에도 어디 올리기에도 시간이 너무 길어서 편집을 어떻게 하나 기능을 이것저것 터치해 봤다. 그리고 하이퍼랩스 기능이 있는 걸 알았다. 시험 삼아 몇 분 찍었는데 몇십 초 분량으로 찍혔다. ‘이런 좋은 기능이 있었다니.’ 하면서 다른 기능들을 살폈다. 슬로모션으로 찍는 기능이 있었다. 찰나처럼 스치는,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좀 더 길게 보고 싶을 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뉴를 이것저것 만지다 보니 인물 사진 기능이 있었다. 초점을 피사체에 맞추고 주변을 흐리게 만들어주는 기능이었다. 이 역시 모르던 기능이었다.      

휴대폰 카메라 기능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찍은 동영상 분량이 너무 길어서 계속 아쉬웠다. 빨리 돌리기로 저장해도 인스타에 올릴 정도의 짧은 분량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일 아침 ‘하이퍼랩스’로 다시 찍자고 마음먹었다.      


여기선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으나, 호텔방 침대에 누워 책만 보면 안 될 것 같아 밖으로 나갔다. 어제 만난 부부가 알려준 폰슨비(ponsonby)에 가보기로 했다. 뉴마켓처럼 요즘 뜨는 동네라고 했다. 딱히 가보고 싶진 않았으나, 갈 곳도 없어서 지도를 켜고 걸었다. 바쁜 일 없으니 천천히 걸어가자고 마음먹고는, 지나가는 곳의 공원을 둘러보고 주택가 집들을 구경하고 하늘과 구름을 보면서 걸었다.     


햇빛이 따사로운 겨울날이었다. 온도는 10도 정도로 바람은 좀 쌀쌀했지만, 걷다 보니 더웠다. 공원을 지나 주택가가 나오더니 계속 주택가가 나왔다.  '도대체 메인 거리는 언제쯤 나타나나, 이 길은 왜 이리 언덕바지 인가, 난 거기 왜 가렸는가, 그만 돌아갈까' 하는 잡념과 함께 그냥 걷고 또 걸었다. 무엇을 보기 위해 나선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1시간 후, 그 동네 한복판에 다다랐을 때, 그 거리가 황량해 보였다. 뜬다는 동네답지 않게 휑해 보였다. 카페의 야외좌석에 삼삼오오 사람들은 보였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다른 가게들도 손님이 없어 보였다. 외관이 더 멋지거나 예쁜 건물이 있지도 않았다. 들어가 보고 싶은 가게가 없었다. 뉴질랜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게, 건물들이 거기에도 있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걷느라 좀 지친 상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잔뜩 내려앉은 구름 때문일까? 30년 전과 비슷한 느낌의 거리는 시내처럼 높은 빌딩으로 매력이 없어지진 않아서 좋았다. 오클랜드만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으니 ‘이 길 끝에서 저 길 끝까지 걸어봐야지’ 하고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끝까지 가기 전에 돌아섰다. 더 가봐야 지금 걷고 있는 길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끝까지 가 봤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리 구경을 멈췄다.     


가끔 그런 일이 있다. 했다는 것으로 위로하는 일. 회사 업무도 어떤 성과를 내기보다, 그냥 했다로 끝나는 일이 있다. 특히, 공공 쪽에서 하는 일의 어떤 업무는 그렇다. 전문가 자문 간담회를 한 후, 그 결과에 따라 일의 방향을 정하거나 개선하고 혹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서 신규사업을 추진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새로 부임한 높은 사람을 공부시키기 위해 하는 간담회가 있다. 그 결과로 파생되는 일은 없다. 그냥 했다로 끝나는 일.


비단 회사일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형식적 안부를 주고받는 것. 기억하지도 못할 상대방의 근황을 그냥 물어보는 것. 그래서 "언제 밥이나 한 끼 먹자"는 말도 그렇다. 그 말을 함으로써, 뭔가 관심을 표명하고, '너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라고 표시한 것 같아 안도한다.      


왔던 길을 돌아갔다. 기왕 돌아가는 길이니 다른 시각을 갖고 싶어 길을 건넜다. 좀 전에 걷던 길에서 가깝게 본 건물을 길 건너 멀리서 보며, 눈에 띄지 않았던 가게들이 더 잘 보이기도 했다. '아, 저런 집이 있었네! 옷들이 예뻐 보이는데 들어가 볼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살 옷도 아닌데, 괜히 옷 구경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희한하게 그날은 그랬다. 모든 게 회색빛으로 보이고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시큰둥했다. 몸은 유난히 지치고 힘들었다. '왜 여기가 핫한 곳이라고 한 거지?' 의문을 가지며 걸음을 멈추었다. 1시간 걸려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우버를 불렀다. 마침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내게 걷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듯이.      


두 번째로 이용해 보는 우버 택시. 2분도 안되어 택시가 도착할 무렵, 비가 제법 내렸다. 젖을 사이 없이 택시를 타서 다행이었다. 기사는 인도사람이었다. 한마디도 나눌 필요가 없어 편했다.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되고 이상한 곳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지 않아 좋았다. 호텔이 보이는 신호등 앞에 택시가 멈췄다. 마침 소낙비가 그쳤다. 갑자기 호텔 앞에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보고 싶었다. 운전사에게 호텔 앞이 아니라 그 가게 앞에 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은 시키지 않고 핫쵸코를 주문했다. 지친 심신에는 차가운 것보다 따뜻한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주문하고 돌아서니 장대비가 또 쏟아졌다. 방금 전만 해도 날이 개일 듯 보였는데 말이다.     


꼼짝없이 발이 묶여 비가 그칠 때까지 멍하니 호텔을 봤다. 내가 묵고 있는 층을 올려다보며 내 방은 어디쯤인가 가늠해 봤다. 그러다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떤 남자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웃통을 벗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기 내 방 아닌가?’ 눈을 감고 도리질을 하고는 다시 봤다. 남자가 계속 보였다. 재빨리 호텔의 층수를 헤아렸다. 아무리 세봐도 저 방이 내 방이어야 하는데 이상했다.


비가 그치자마자 신호등을 재빨리 건너 호텔로 갔다. 내방이 있는 8층에 내려 객실 번호를 확인했다. 1-20까지 방 번호 안내가 있었다. 호수를 보니 803호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화문에 적혀있다. 복도 반대쪽으로 걸어가 봤다. 거기에도 객실 하나가 없었다. 실제 객실은 없고 방화문에 호수만 적혀 있었다. 층마다 객실은 18개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방은 다섯 번째가 아니라 네 번째였던 것이다. 쿵쿵거리던 가슴이 그제야 진정되었다.      

왜 방화문에 호수를 적어놓은 것인지 미스터리다. 나중에 방을 만들 공간도 없어 보이던데... 그나저나 창가에 가까이 갈 때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겠구나 싶었다. 호텔은 전망이 좋고 아침 뷔페값도 적당하고 시내에 걸어 다닐 수 있어 편리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텔은 전망이 없는 데다 차량 진입이 어려워 보이는 곳이 꽤 있었다. 공사 중이라 통행이 불편한 곳도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숙박료도 내 형편에 맞았고 아침 뷔페 메뉴도 마음에 들었다. 좋아하는 연어회를 매일 먹을 수 있었다. 뉴질랜드 연어는 정말 신선하고 맛있다. 첫날 체크인하던 날의 기억은 별로였지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호텔 방에서 쉬는 게 정말 편했다. 여행한다고 꼭 뭔가를 보러 열심히 돌아다녀야 하는 건 아니다. 마음 편하게 휴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음악 듣고 책 보고 자고.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해외여행 가서 해야 하나 싶지만, 일상에서는 의외로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람 만나고 내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로 바쁠 때가 많다.


여행은 오롯이 나만, 주변의 모든 것은 생각나지 않고, 나만 볼 수 있다. 한껏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 혼자 여행의 묘미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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