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이란 창조적인 질병으로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악마의 모습까지 여행한 후, 거기서 곧바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김혜남의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라는 책에 나온 말이다. 연애는 삶에 활력과 기쁨을 주지만 끝나고 나면 온갖 슬픔과 괴로움을 준다. 그런 가운데 좋은 것 하나는 실연은 창조의 기운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점이다.
불현듯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미술 시간을 좋아해 본 적 없다. 스케치북, 크레파스, 연필, 수채화 물감, 팔레트, 물통, 붓, 목판, 조각칼 등등 준비 도구가 많아 귀찮은 수업이었다. 잘하지 못해 재미도 없었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재밌는 거라곤 데칼코마니 수업이다. 도화지 한쪽에 물감을 아무렇게나 칠해놓고 반으로 접었다 펴서 양쪽을 똑같이 만들었던 기억. 나비를 만들었던 것도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갑자기 그림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생뚱맞은 일이었다. 30대부터 미술관을 다니기는 했다. 항상 일과 공부를 하느라 이성적이고 논리적 사고만 키운 탓에 좌뇌만 발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림 볼 줄을 몰랐기에 유명 화가 전시회 위주로 다녔다. 감상은 제각각 하는 것이라고 하길래 그림 제목 보고 그림 보고 가끔 오디오 설명 들으며 다녔다. 전시회를 다녀오면 머릿속에 남는 그림은 하나 혹은 두 개. 시간이 지나면 그나마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저 미술 전시회를 다녀온 그 자체로 만족했다. 그 무렵 왼손 쓰는 연습을 병행했다. 뇌와 손은 반대라고 해서 왼손을 자주 쓰면 우뇌를 발달시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먼저 젓가락질을 연습했다. 한 달쯤 지나자 반찬을 곧잘 집을 수 있었으나 속도가 너무 느렸다. 어떤 반찬은 잘 집어 지지 않아서 집고 놓치기를 반복했다. 웬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라면 지저분해 보여서 혼자 먹을 때만 왼손을 쓰다가 급한 성격 탓에 얼마 못 가 관두었다. 영화, 드라마에서 왼손으로 글 쓰는 사람이 멋져 보여 시도했지만, 일주일이 안 되어 포기했다. 왼손 글쓰기는 도무지 연습한다고 나아질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컴퓨터 마우스는 왼손으로 사용하기 쉬웠다. 왼쪽과 오른쪽 클릭의 사용법을 기억하니 쓰기 편했고 금세 익숙해졌다. 그렇게 왼손으로 마우스를 쓴 게 어느덧 20년이 되어간다. 실연으로 식욕을 비롯해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았을 때,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긴 건 우뇌를 꾸준히 자극했기 때문 아닐까?
속 안에 무언가 분출해야 할 것이 쌓이면 터트려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실연 후 알았다. 그림을 그린 시기에 브런치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브런치는 글쓰기 앱이다. 베타 서비스할 때 작가 신청을 했다가 한 번의 고배를 마시고 재수 끝에 통과했다. 나름 글 써도 된다는 인증을 받은 것 같아 자신감이 조금 상승했다. 그때 거의 매일 썼다. 실연의 상처에 대해서. 어떤 글은 메인에 올라 하루 만에 조회 수가 10,000회를 넘기기도 했다. 우울한 가운데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실연은 또한 내 안에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은 모습을 발견하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다. 연기가 바로 그것이다. 연극과 뮤지컬 관람은 오래된 취미생활이다. 기억나는 첫 공연은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본 뮤지컬이다. 몇 살 때였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남동생과 같이 봤다. 극장도 솔직히 확실하지 않은데 창고극장 근처 거리가 떠오르는 걸 보면 맞는 것 같다. 지금은 대배우가 된 이혜영 주연의 "철부지들"이란 공연이었다. 그 후 "판타스틱(The fantasticks)"이란 제목으로도 공연했는데, 그 뮤지컬의 유명한 노래가 "Try to remember"다. 소극장 작은 공간, 바로 코앞에서 그 노래를 부르던 여주인공 이혜영의 눈이 반짝반짝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몇 해 전 그녀가 출연한 갈매기를 봤다. 매혹적인 목소리와 연기가 여전했다.
이후 연극의 현장감 넘치는 무대가 좋아 자주 보러 다녔다. 대극장에서 하는 뮤지컬의 감동은 “미스 사이공(Miss Saigon)”을 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오페라의 유령, 위키드, 레베카, 레미제라블, 맘마미아, 삼총사, 지킬 앤드 하이드, 에비타 등등을 봤지만 20대 때 호주 시드니 극장에서 본 무대는 압도적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대극장 뮤지컬을 본 적이 없어서일 수 있다. 그때는 소극장 뮤지컬과 연극을 주로 봤던 때다. 대극장 무대에 헬리콥터가 등장하는 웅장한 규모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배우들은 움직임이 많음에도 음정 하나 틀리지 않고 안정감 있게 노래하고 연기했는데 그 모습이 엄청 신기했다.
연극은 장진 연출의 작품을 많이 보러 다녔다. 그의 독특한 유머 감각을 좋아한다. “서툰 사람들”, “택시 드리벌”, “박수 칠 때 떠나라”, “매직 타임” 등등. 그래서 그가 영화감독이 되어 만든 영화도 거의 다 봤다. 특히 “기막힌 사내들”은 배꼽 잡고 본 영화다. 웃기는 대본에 배우들의 능청맞은 연기가 한몫했다.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등은 물론이고 각본을 썼다고 하여 “화성으로 간 사나이”란 영화도 봤다. 배우 김희선이 출연했기에 보기도 했다. 난 그녀의 팬이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다. 너무 잔잔한 내용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장진 연출의 최근작 “꽃의 비밀”을 봤는데 그의 유머 코드는 여전했지만, 예전만큼 웃음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나이 든 탓일 것이다. 더 이상 낙엽이 뒹구는 모습에 까르르 웃음이 나오지 않는 나이다. 그렇게 연극과 뮤지컬을 꽤 보러 다녔다. 연극관람이 취미였지 연극 참가자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는데 직장인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독서, 영화감상, 음악 감상이라고 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 절반이 말할 만한 취미다. 독서량 질문을 받는다면 말수가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건 틀림없다. 책장에 책을 분류하여 꽂아놓으면 부자가 된 듯 뿌듯했다. 물론 다 읽은 책으로. 다 읽지 않은 책은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놔두는 데 어느새 탑처럼 쌓였다. 평소 서재를 갖는 게 소원이었는데 독립했을 때 그 꿈을 이뤘다. 방 한쪽 벽면에 맞춤 가구로 책장을 들여놓고 그 방에 책상과 의자를 넣어 나름 서재로 꾸미고 살았는데, 정작 그 방에서 책을 본 건 손에 꼽는다. 늘 하던 버릇대로 책은 침대에서, 방바닥에 누워서 봤다. 어려서부터 이불속에서 읽던 습관 때문인지, 책상에 앉아서는 잘 읽게 되지 않는다. 지금도 책은 누워서 봐야 제격이다. 읽다가 졸리면 잤다가 다시 깨서 읽는, 늘어지는 시간이 좋다. 영화는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던 10~20대 시절에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TV에서 하던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을 빼놓지 않고 봤다. “출발 비디오 여행”을 챙겨보고 씨네 21을 자주 읽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극장에 잘 가지 않는다. 흥미를 잃은 이유가 코로나 시절에 가지 않아서인가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가 드물기 때문으로 결론지었다. 개인적으로 “마블”, “DC” 시리즈의 영웅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포영화나 잔인한 장면이 많은 영화도 싫다. “노팅힐” 같은 로맨스 영화나 “식스 센스”, “유주얼 서스펙트”와 같은 반전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요즘엔 잘 없다. 음악 감상은 영화보다 더 즐기지 못하는 취미가 되었다. 매일 아침 라디오로 알람을 설정해 놓고 출근 준비하며 음악 듣는 생활을 20년 넘게 했다. 80~90년대 가요는 거의 다 꿰었고 가사도 많이 알았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고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 나오면 바로 카세트테이프, CD를 구매했다. 출, 퇴근길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고 혼자 있을 때면 블루투스 스피커로 연결하여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는 걸 좋아했다. 가요뿐만 아니라 팝송, 샹송은 물론이고 뉴에이지 음악도 좋아했다. 조지 윈스턴, 유키 구라모토, 앙드레 가뇽 등의 음악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들의 연주곡 제목이 가물거릴 정도다. 무엇이든 반복하지 않으면 잊는다. 자주 듣지 않다 보니 멜로디만 기억날 뿐 제목을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완전히 삭막한 하루를 보낸 날은 일부러 퇴근길에라도 들으려 하지만, 대체로 음악 앱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이렇게 하루에 한 번도 음악을 듣지 않는 날이 많다. 마음먹어야 한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던 음악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만큼 내 마음이 각박해졌나 싶을 때가 있다.
독서, 영화감상, 음악 감상은 실연 이전의 취미생활이고 지금 명맥을 유지하는 건 독서 정도다. 그 자리에 그림 그리기, 글쓰기, 연극하기가 들어왔다. 죽이든 밥이든 결과물이 생기는 취미다. 모두 창의성이 요구된다. 창의력은 부족하지만 창작하는 일이 재미있다. 수동적 향유자에서 능동적 참가자로 즐긴다. 우뇌가 발달된 게 틀림없다.
실연 후 상담을 통해 알게 된 내 모습 중 하나는 예술가 기질이 있다는 것이다. 아주 남의 나라 얘기로 치부했던 ‘예술’이란 분야가 내 생활에 성큼 들어왔다. 작가 김혜남의 말처럼, 실연으로 내 안의 악마를 보고 나자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들끓었다. 창작의 열망이 점점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