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뭐 해? 시간 괜찮으면 연극 볼래?” 명절 3주 전, 회사 후배 윤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통은 혼자 잘 다니지만, 가끔 혼자가 싫을 때 윤지에게 먼저 물어본다. 윤지는 시간을 낼 수 없거나 본인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일이면 안 된다고 바로 명료하게 의사 표현한다. 괜히 상대방 배려한답시고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아 좋다. 억지로 만나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좋다고 하면 만나고 아니라고 하면 관둔다. 그렇기에 나도 안된다고 할 때 서운하지 않다. 된다고 하면 기분 좋게 만난다. 이렇게 ‘된다, 안 된다’를 단순하게 말하는 사이라서 편하고 좋다. 윤지는 무용, 클래식 공연을 좋아한다. 나는 무용은 완전 문외한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십 대 때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박수하는 소리에 깬 적이 있다. 그 후 무용 공연은 담을 쌓고 살다가 발레리나 강수진의 공연을 봤는데, 다행히 공연 끝까지 졸지 않았다. 하지만 공연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또래의 발레리나가 그렇게 우아하고 힘 있게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 발레공연 하니 생각났는데, 2022년 크리스마스에 예술의 전당에서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재밌게 봤다. 조카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덕분에 그 유명한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전체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윤지의 답을 기다렸다. 대화방을 노려보며. 혹시라도 거절하면 누구와 갈까 궁리하면서. 내가 같이 보자고 한 공연은 국립극장에서 공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연극이란 장르, 좀 비싼 표 때문에 내키지 않는다고 할까 봐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답을 기다렸다. 1분이 10분인 듯했다. 윤지가 바로 답했다. “사실 전 막 당기지 않지만, 경험 삼아 볼게요” 나는 좀 미안한 마음에 다른 연극을 보거나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그런 연극을 볼 수 있겠냐며 좋다고 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이라서 좋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TV로만 접했던 박근형, 신구 두 사람의 무대 연기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한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축적한 장인들의 연기는 어떨지 무척 기대되었는데, 기대 이상의 감동이었다. 그들이 TV에서 주변인 역할이었다면 무대에서는 시선을 압도하는 주인공이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정확한 발음과 대사 전달력으로 관객이 극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윤지는 기대 이상으로 괜찮은 연극이었다며 만족해했다.
카페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고도”가 무엇인지를 얘기하다가 이루지 못한 꿈,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닐까 하는 의견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 가보지 않은 길에 ‘결혼’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윤지는 이사를 곧 해야 하는데 엄마하고 다시 같이 살지 계속 독립해서 지낼 건지 고민된다고 했다. “저는 엄마한테 결혼한 셈 치고 따로 살자 했거든요. 그래서 겨우 독립했는데 요새 엄마가 같이 살자는 말씀을 하셔서 고민돼요”라며 씁쓸히 웃었다. 결혼했다면 하지 않았을 고민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결혼했다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런 이유로 결혼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냥 내 취향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 독립한 김에 작은 집을 살까 하는데, 엄마랑 합치면 작은 집은 어렵잖아요.”라고 했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우리가 이십 대 시절에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 해야 할 일은 결혼 뒤로 미루고는 했다. 특히 집을 사는 일이 그랬다. 결혼 후 부부가 힘을 합쳐 만들어 내는 일 중 하나가 집이었다. 결혼해야 ‘진정한 어른’이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재산 증식’ 이 한몫할 것이다. 따라서 결혼 전에는 집을 살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여자는 그랬다. 집은 남자의 몫이었다. 우리 때도 “돈 없어서 결혼 못 한다”라는 소리가 있었는데 지금 세대는 “포기”라는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 남자에게 과도하게 부여된 의무 같지 않은 의무였다. 나도 그런 생각에 길들여져 돈을 벌었어도 집 살 계획은 전혀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흔에 이직한 후에야 연말정산을 계기로 재테크, 노후대책을 신경 쓰게 되었다. 연말정산 결과 남들은 환급받는데 난 세금을 더 토해내야 했다. 알고 보니 공제항목이 하나도 없는 게 문제였다. 기혼자들은 자식 인적공제가 있었는데 내겐 없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은 개인연금 가입 등으로 세금 공제를 받고 있었다. 뒤늦게 세금 공제 가능한 금융상품에 죄다 가입했다. 집 장만을 위해 대출도 받았다. 공제 대상을 직계존속으로만 한정한 건 유감이다. 가끔 조카 학원비, 등록금을 낼 때가 있는데 교육비로 공제받을 수 없다. 조카는 직계존속이 아니다. 그래도 혈연관계인데 아쉽다. 세상이 변해 비혼인 이모, 고모, 삼촌이 증가하고 있고 그들이 조카에게 물질적으로 쏟는 정성을 세금 공제로 인정해 주면 좋겠다.
집을 마련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은퇴 후 일하지 못하더라도 주택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되었다. 그 경험으로 윤지에게 세금 공제되는 금융상품에 가입할 것과 집 살 것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혼자 늙어가는 우리는 노후대책을 미리미리 만들어놔야 한다고. 생산성 있는 경제인구로 분류될 때 부지런히 돈을 모아야 한다. 말 나온 김에 코인, 주식 등에 관해서도 얘기했다. 하지만 우리는 적금, 예금 외에 원금을 보장하지 않는 금융상품은 가입하기 꺼린다는 걸 알았다. 요즘 너도나도 금융문맹 탈피를 외치며 각종 유튜브 콘텐츠, 책 등을 많이 소비하고 있는 때에 그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며 빈말같이 흘렸다. 교육의 힘은 이런 데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돈 밝히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라 그런지 재테크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기존의 아는 것 외에 뭔가 새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알아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나마 결혼 후로 미룰 필요가 없다는 걸 인식하게 된 점은 다행이다.
반지, 목걸이도 남자에게 받아야 한다고 알았다. 특히 반지는 프러포즈의 상징이었으므로 내돈내산(내 돈 내고 내가 사는)할 꿈을 꿔본 적 없다. 가끔 남자 친구, 남편으로부터 반지 선물 받은 친구를 보면 부러웠다.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을 때 무척 기뻤다. 헤어지고 나서도 그 반지를 평생 간직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은 정말 망각의 동물이 맞다. 그런 반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때 그 반지는 어디에 뒀지?’ 하는 물음이 떠올라 찾았는데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아 한참을 여기저기 뒤지고 찾느라 애먹었다. 겨우 발견했을 때, 그 반지는 더 이상 내게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저 반지일 뿐이었다. 귀금속상을 여러 곳 돌며 제일 값을 많이 쳐 준 곳에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고기를 사 먹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그 후 예쁜 디자인의 반지를 내 돈 주고 샀다. 그것도 여러 개. 겨울철과 여름철에 바꿔 낄 수 있게. 목걸이도 유행 타지 않는 거로 샀다.
“에이징 솔로” 책에서 비혼 중년이 취약하고 비참해지는 이유는 생애 과제, 즉 주거, 경제적 독립, 정서적 안정, 노년의 준비 등을 잘하지 못할 것으로 예단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견 동의가 되는 말이다. 특히 여성을 보는 시각에는 그런 부분이 더 강할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은 작가 제인 오스틴이 살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고 그 이데올로기는 MZ 세대를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회사 후배들이 남녀 구분하지 않고, 결혼과 상관없이, 각자 능력 범위 안에서 집을 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부동산 지식은 물론이고 코인, 주식 투자를 한다. 가끔 큰 이득을 얻어 부모님 집에 보탰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우리 때보다 훨씬 똑똑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이 멋지다.
윤지는 엄마와 같이 살기보다 혼자 살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엄마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독립하기 정말 어려웠는데 다시 합치면 제가 힘들어질 거 같아요.”라며 지금 가진 돈으로 어디에 정착할 수 있을지 알아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