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미술학원에서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요새는 "원데이 클래스((one day class)"등 그림을 쉽게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아졌는데 그 당시만 해도 입시 미술학원이 많았다. 가는 곳마다 데생을 6개월씩 그려야 한다고 했다. ‘헉~, 데생만 6개월!’ 그 말에 기가 질렸다. 스케치북과 72색 색연필을 구비하고 클림트(Klimt)의 ‘키스’, 에바 알머슨(Eva Armisen) 등의 그림을 따라 그리던 나는, 색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데생을 그리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기초를 배우겠다는 의지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기초를 ‘완전 정복’하겠다는 결심은 없었다. 입시가 아닌 취미, 진짜 쉽게 그릴 수 있는 성인 취미반을 찾아 헤매다 드디어 원하던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연필로 선 그리기, 데생, 소묘 등 기초를 배웠다. 그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었지만, 입시가 아닌 취미라는 말 때문인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기초수업을 대략 석 달 정도하고 연필, 펜으로 그리다가 색연필로 채색하는 걸 배웠다. 점점 수채화, 마커, 아크릴화로 발전해 유화를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학원에서 주는 그림, 사진 혹은 유명한 그림을 따라 그렸다. 그러다가 사진작가로 일하는 친구 조영의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한 사진을 보게 되었다. 고요한 바다에 해가 뜨기 직전의 여명 또는 해가 지는 노을 모습이 신비로웠다. 그 사진에 영감을 받아 ‘하늘, 바다 시리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언젠가 너 사진과 내 그림을 같이 전시하자고 제안했는데, 거절당했다. 조영은 "네 그림을 내년에 보고도 만족하면 그때 하자"고 했다. 그리고 자기 작품은 전시회를 할 만큼 훌륭하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사진으로 돈 버는 작가인데 너무 겸손한 발언이었다. ‘하늘, 바다’ 시리즈 그림을 10개 정도 그리자 하늘과 바다를 표현하는 일이 수월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림마다 아쉬운 점이 보였다.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만했다. 어떤 현상, 어떤 사물을 보는 눈이 생기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과거의 것은 조금 부끄럽게 여겨진다. 그 당시는 심혈을 기울여 정성을 쏟아도 그때 할 수 있는 만큼, 아는 만큼만 하게 된다.
그림을 그릴 때는 시간이 잘 간다. 몰입도 잘된다. 두, 세 시간 그리고 나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온갖 근심을 그 순간만큼은 잊게 된다. 더불어 결과물이 손에 잡혀 재밌다. 수채화를 배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남의 것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닌,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화실 선생님은 평소 관심 있는 풍경, 사물의 사진을 많이 찍고 그 사진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연습을 해보라고 했다. 사진을 똑같이 그리지 않고 관점만 다르게 그려도 자신만의 창작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출근길에 있는 꽃집 울타리에 핀 보라색 꽃을 찍었다. 울타리를 따라 가로로 늘어선 꽃을 세로로 그려봤다. 무리 지어 핀 꽃 일부를 그렸다.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완성되자, 그 그림을 프린트한 에코백을 만들려고 인터넷 검색을 숱하게 했다. 일단 원안 색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곳이면서 에코백 크기와 디자인 모두 마음에 드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에코백은 주머니와 잠금장치(지퍼나 단추)가 없는 것이 많았다. 난 어깨끈을 굵게 하고 크기가 좀 크면서 똑딱이 단추를 달고 주머니가 있는 에코백을 만들고 싶었다. 제작 물량도 50개 정도만 만들고 싶었는데, 업체마다 최소 주문 수량은 100개라고 하여 고민했다. 에코백 제작업체는 수량이 줄면 단가가 올라가므로 싸게 제작하는 것이 낫다고 했지만, 불필요하게 많이 만들어 애물단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여러 곳과 이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최소 수량을 50개에 맞춰주겠다는 곳을 찾았다. 파일로 전달한 그림 시안도 썩 괜찮았다. 원가 거의 2만 원에 가까운 나만의 에코백을 만들었다. 물건을 받았을 때 아주 아주 뿌듯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든 기분, 세상에 단 50개만 있는 에코백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그림을 완성했을 때 느낀 뿌듯함보다 더한, 뭐랄까 대견함, 성취감이 컸다. 처음으로 탄생한 나만의 창작 상품(goods), 친구와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줬다. 50개 한정판임을 강조하며. 에코백을 받은 사람은 한결같이 좋아했다. 어떤 사람은 에코백 자체를 내가 만들었다고 착각하여 더 놀라기도 했지만.
그 후 수채화로 그린 다른 그림으로 파우치를 만들었다. 작은 핸드백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화장품이나 여성용품을 넣고 다닐 수 있는 앙증맞은 크기였다. 제작업체가 요구하는 최소 수량 100개를 호기롭게 주문했다. 엄마, 여동생, 올케, 조카, 이모, 사촌 등 가족과 친척은 물론이고 친구, 회사 동료, 화실 선생님, 극단 사람들 등에게 나눠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굿즈는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없는 물건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 특별한 마음을 전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주는 기쁨이 크지만 받는 사람이 좋아하고 놀라는 표정을 보는 재미도 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으로 물건을 만드는 일이 즐겁다. 요즘엔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는 세상이다. 시류에 맞게 각자 직접 디자인한 후드티, 휴대전화 케이스, 방석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파는 플랫폼이 여럿 생겼다. 플랫폼 회사가 물건을 제작, 배송까지 해준다. 이제는 에코백이나 파우치를 제작하기 위해 업체를 일일이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 나는 판매 목적보다 지인 선물용, 내 소장용으로 그 플랫폼을 활용하는데 1개만 주문할 수도 있어 편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