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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Aug 18. 2024

귀찮아서 꾸준합니다

다희가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저는 뭔가를 꾸준히 못하는데 팀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하세요? 정말 대단하세요”라고. 난 “귀찮아서 그래”라고 답했다. 다희는 짧게 짧게 이것저것 많이 배웠는데 남는 게 없다고 한탄했다. 나도 오래 한다고 잘 알거나 잘하는 게 아니라고 알려 줬다.      


나는 대체로 무엇을 배우기 시작하면 꾸준하게 하는 편이다. 수업 과정이 정해져 있다면 그 과정을 마칠 때까지 관두지 않는다. 하다 마는 법은 별로 없는데, 그렇다고 그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다. 시작했으므로 끝을 맺을 뿐이다. 끝맺음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은 잘 끝내지 않는다. 브런치에 2015년부터 글을 쓰고 있다. 중간에 전혀 글을 쓰지 않은 기간도 있지만, 탈퇴할 마음을 가진 적 없다. 그림은 2016년부터 그렸는데 처음에 간 화실을 지금도 다닌다. 화실이 대학로에서 삼선동으로 한 번 이사했는데 따라갔다. 매주 주말 요일을 정해놓고 습관적으로 간다. 직장인 극단도 2016년에 입단했는데 공연에 매번 참여하지 않아도 탈단하지 않는다. 사람이 많으면 으레 그렇듯 간혹 시끄러운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걸 이유로 다른 극단으로 옮길 생각은 없다. 헬스장에 2020년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아직 같은 곳으로 다닌다. 하지만 만일 화실이나 극단 연습실, 헬스장이 내 생활반경을 벗어난다면 십중팔구 다른 곳을 알아보거나 취미활동, 운동을 접었을 것이다. 먼 곳으로 가거나 새로운 곳을 알아보기 귀찮기 때문이다. 무언가 배우러, 보러 멀리 이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은 별개다) 시작하기 전에 요모조모 알아보고 결정한 곳이기 때문에,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일례로 10년 넘게 다닌 미용실의 헤어 디자이너가 아주 먼 동네로 옮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사는 동네로 미용실을 옮겼다. 그렇지만 브랜드가 같은 미용실이고 단골 헤어 디자이너가 추천한 미용사에게 맡기고 있다. 새로운 미용실을 알아봐야 하는 귀찮은 과정을 겪고 싶지 않아 무조건 따랐다.    

 

휴대전화 통신사를 15년 넘게 한 곳을 쓰고 있다. 통신사 변경하면 할인 혜택이 많다고 꾀어도 잘 바꾸지 않는다. 여러 절차가 복잡하고 귀찮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웬만하면 앱이나 홈페이지에 잘 가입하지 않는다. 사고 싶은 물건이 어떤 특정 앱에서만 팔면 비회원으로 주문하고, 그런 기능이 없다면 물건 사기를 포기한다. 해당 앱을 자주 쓸 것 같고 유용하다고 판단하면 회원으로 가입하는데, 유사 업종 다른 앱은 아무리 혜택을 많이 줘도 잘 가입하지 않는다. 내게 쇼핑은 네이버다. 이미 멤버십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쿠팡, 마켓컬리 등의 편리함, 물건의 신선함, 가격의 저렴함 등에 대해 알려줘도 사용하지 않는다. 워낙 온라인 쇼핑을 자주 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성을 못 느낄뿐더러 무엇보다 가입하기 귀찮다. 네이버 쇼핑으로 검색해서 주문하려는데 네이버페이가 되지 않으면 멈춘다. 네이버페이로 결제할 수 있는 사이트를 다시 알아보고 가격이 좀 비싸도 그 사이트에서 구매한다. 웹툰과 웹소설 시작을 카카오페이지(카페)로 했지만, 네이버 멤버십에 가입하면서 시리즈를 알게 된 후 카페와 시리즈를 번갈아 본다. 효용이 낮아도 이미 가입한 사이트를 버리지 못한다. 탈퇴가 귀찮다. 블라이스, 리디 등 다른 플랫폼에 가지 않는다. 블라이스는 통신사 멤버십 혜택으로 무료로 볼 수 있는데도 가입하는 일은 내게 진입장벽이다. 여행예약 앱은 초창기 아고다에서 부킹닷컴을 쓰다가 최근에 마이리얼트립(MY REAL TRIP)으로 옮겼다. 내 기준으로 ‘여기 어때’, ‘야놀자’보다 UX가 더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를 정하면 다른 앱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마케팅하는 사람의 시각으로는 충성고객처럼 보일 테지만, 사실 그건 내가 귀찮은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물건을 좀 비싸게 사거나 보고 싶었던 전시회, 공연 등을 안 봐도 된다고 외면하는 일이 벌어진다. 멀다고 안 가는 공연과 전시회는 그만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위로하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 마음이 상당히 지속된다. 엑스파일은 1994년 우리나라에서 방영할 때부터 팬이 되었는데, 지금도 두 주인공 질리안 앤더슨(Gillian Anderson)과 데이비드 듀코브니(David Duchovny) 뉴스를 관심 있게 읽는다. 두 사람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더 이상 보지는 않지만, 그 여파로 천리안 엑파(엑스파일) 동호회 사람들과 연락하고 지낸다. 소녀시대를 2010년에 뒤늦게 알게 된 이후로 가끔 그녀들의 소식을 들여다본다. 몇몇 멤버가 출연하는 뮤지컬 공연, 드라마가 재미없어도 연기를 좀 못해도 의리로 본다. 배우 김희선은 ‘바람의 아들’부터 좋아해 그 이후 출연작은 거의 다 봤다. 그녀가 아프거나 죽는 역할을 할 때면, 가수가 노래 따라가고 배우가 역할 따라간다는 속설처럼, 그녀가 요절할까 봐 엉뚱한 걱정을 했다. 쓸데없는 기우였지만 팬의 마음이었다. 40대에도 꾸준히 연기하는 모습이 좋다. 나는 팬심, 덕후의 마음을 이해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다 찾아 읽어보는 편이다. 박완서, 마스다 미리, 베르나르 베르베르, 파울루 코엘류 등. 분명 책을 읽었는데 책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어이없지만. 그 버릇대로 웹소설을 선택할 때 내 취향의 작가를 만나면 그 작가 작품을 우선 찾아 읽는다.      


귀찮다는 건 동시에 여러 곳에 관심을 두기 어렵다는 말일 수 있다. 외적 에너지보다 내적 에너지에 집중하는 편인 나는, 하나를 정할 때까지 탐색 과정을 거치며 그 후 결정을 하고 나면 그대로 밀고 간다. 이럴까 저럴까 계속 망설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머리든 마음이든 복잡한 건 싫다. 귀찮은 걸 피하려면 단순해야 한다. 단순하게 만들면 생각이든 행동이든 하기 쉬워진다. 하기 쉬워지면 꾸준히 하게 된다. 꾸준함이 잘하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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