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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Aug 17. 2024

돈 쓰며 연극하기

첫 공연을 마치자 선배 단원들이 물어봤다. “공연 끝내고 난 소감이 어때요? 좀 아쉬운 부분은 없어요?” 나는 연습 내내 가졌던 부담감을 드디어 떨쳐냈다는 홀가분함이 훨씬 컸기에 “전혀 아쉽지 않아요!”라고 했다. 말 그대로 속 시원했다. 그 이상 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선배들은 두 장면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씬스틸러(Scene Stealer) 였다고 극찬을 해줬다. 아마도 첫 연습에서 막막함을 갖게 한 배우가 결과적으로 실망스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딸의 연기를 보시고 “연습하면 안 되는 것이 없구나”라고 했던 엄마 말씀이 맞다. 같은 장면을 연습하고 또 한 결과다. 무대 뒤에서는 바들바들 떨리다가도 무대에 나가면 내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다. 수없이 반복한 연습의 효과였다. 연기를 잘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내가 한 거라고는 연습 시간에 늦지 않게 가고, 청소 열심히 하고, 짜 준 동선대로 움직이고 선배가 가르쳐준 대사 톤과 동작을 몸에 익도록 연습한 게 전부였다. 다행히 극장을 일주일 대관하여 무대 설치를 했기에 반복 연습하기 좋았다. 분장을 진하고 표독스럽게 한 것도 한몫했다.     

 

연습할 때는 내 것만 신경 쓰느라 잘 몰랐는데 공연을 마치고 나니 작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애썼는지 보였다. 조명과 음향은 말할 것도 없고 소품, 의상, 분장, 무대 디자인과 설치, 홍보, 현장 진행, 기획까지. 수많은 사람이 한 작품을 올리기 위해 각자 맡은 일을 척척 해내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더구나 전문가 아닌 직장인인데 어쩜 그리 다재다능한 사람이 많은지 놀라웠다. 그렇게 첫 공연을 무탈하게 마치고 나자 무대에 서는 일이 즐거워졌다. 두 달 후에 또 무대에 섰다. 정기 공연보다 완성도는 낮지만, 각자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하여 여러 팀이 단막극을 올리는 페스티벌에서 3인극을 했다. 거기서는 주인공을 했다. 꽃가게 주인 역할이었는데 연습에 연기가 조금 가미되었다. 매우 어색하고 어설펐지만 나름 만족했다. 지금까지도 제일 마음이 가는 인물이다. 그 후 몇 편의 작품에 배우로 활동했다. 연습 시간은 힘들지만, 무대의 생동감이 좋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배우로 참여한다. 공연 연습은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다섯 달까지 하기에 주중 연습 시간에 참석할 수 없다면 스태프로 참여했는데 주로 조명을 담당했다. 조명 담당자는 극장에서 연습할 때 꼭 필요한 사람이다. 조명 아래 서면 배우의 연기가 훨씬 나아진다. 연습실에서 할 때보다 더 몰입이 잘되기 때문이다. 조명을 담당하면 연습, 공연을 여러 번 보게 된다. 공연일이 코 앞인데 아직 동선 합을 못 맞춘 장면, 대사를 다 외우지 못한 배우를 보며 불안하다가도 공연 당일에 완벽하게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린 공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배우는 본 공연에서 자기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의 다른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없다. 연습 때 봤어도 실제 공연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조명, 음향 오퍼는 모든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회차를 거듭할수록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대사의 연관성, 이야기를 아주 잘 이해하게 된다. 그건 조명에도 영향을 주어 페이드 아웃(fade out)을 좀 더 천천히 하거나 핀 조명을 좀 더 대사에 맞춰 암전시키는 등 타이밍을 조절하여 극 분위기를 더 살릴 수 있게 만든다. 1초, 2초의 차이로 관객의 집중도가 달라진다. 감동이 배가 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미세한 차이는 아무도 모른다. 가끔 눈치챈 연출이 “이번 회차의 조명이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해줄 때 기쁘다.     


몇 년 전에는 페스티벌 작품 중 한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그 작품의 배우들이 연출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내게 요청했는데 연출의 이응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들은 전체적인 모양만 잡아달라고 했다. 바쁘면 연습에 많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내게 부탁할까 싶어 수락했다. 첫 리딩과 연습 서너 번까지 관망하는 자세였다. 내가 선택한 작품이 아니고 배우 중에 연출 경험 있는 사람이 있었고 작품 분석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출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만큼 책임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연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배우들이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장면 해석이 다른 부분에서는 서로 얘기를 나누며 만들었다. 그러자 배우들이 의상, 소품, 헤어스타일 등을 하나씩 확인해 달라고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것까지 고민하지 않았기에 그 부분은 캐릭터에 맞게 배우들이 선택하라고 했다. 그래도 배우들은 연출이 컨펌하기를 원하여 할 수 없이 배우 제안을 동의하는 수준에서 결정했다. 하지만 무대, 조명, 음향은 내가 고민해야 했다. 처음 배우 할 때 느낀 부담감과는 다른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완성도 낮은 공연이라도 작품의 색깔을 정하는 일이었다.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고 편집하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 페스티벌은 10분에서 40분 정도 작품 여러 개가 한 회차에 올라간다. 여러 작품이어서 작품당 공연 횟수는 2회 정도다. 따라서 한 작품만을 위한 조명설치가 어려워 기본 설치된 조명을 활용해야 한다. 다행이었다. 기실 연출의 색깔이라고 할 것도 없었는데, 기본적인 무채색을 보여줄 수 있으니 좋았다. 하지만 저작권에 걸리지 않는 음향과 음악을 찾아 원하는 부분만 딱 맞게 편집하는 일, 그건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음악을 많이 모르니 장면에 어울릴 음악이 전등 켜지듯이 탁 켜지지 않았다. 무작정 유튜브에서 음악을 듣고 장면에 맞는지를 고민했다. 공연 당일 조명, 음향 오퍼는 따로 있지만, 인원이 부족해 페스티벌 공연에선 연출이 상당 부분을 담당한다. 장면마다 몇 개의 후보 음악을 골라 연습 장면과 맞춰 보며  선택했다. 그렇게 얼결에 연출 작품을 무사히 끝냈다. 워낙 배우들의 기량이 출중하여 묻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다음 해에 또 연출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때도 배우들이 다 만든 작품에 숟가락만 얹었다. 연출자는 작품의 지휘자로 수많은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배우와 스태프를 아우르며 통솔력을 발휘해야 한다. 어설펐지만 배우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낀 영역이다. 언젠가는 내가 선택한 작품으로 연출을 해보고 싶다.      


직장인 극단은 어떤 면에서는 프로 극단보다 풍족하다. 매월 회비로 연습실 월세를 낸다. 연습실을 갖지 못한 프로 극단이 우리 연습실을 대관해서 사용한다. 공연을 올릴 때마다,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는 참가비를 낸다. 그 돈으로 극장 대관을 비롯한 필요경비를 충당한다. 연극은 돈이 좀 드는 취미다. 내 돈 내고 내 시간 들여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자초하고 심리적 부담, 압박감을 이겨내야 한다. 과정이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공연을 마치고 나면 성취감과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놓고 싶지 않다. 배우, 연출, 조명, 음향, 포스터 만들기 등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아 두렵고 낯설었지만 경험하고 배울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연극은 사람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희곡으로 문자로만 존재하던 것을 살아 숨 쉬는 유기체로 만드는 작업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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