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2
4시 퇴근하고 꽃집에 들러 프리지어를 샀다. 노란 프리지어의 꽃말은 "너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석사졸업한 후배 미영에게 딱 맞는 꽃말인 데다 프리지어 향기가 좋아 샀다. 또 다른 후배 티아를 위해서는 블루베리 캔디를 샀다. 소소한 선물을 주는 일이 기쁜 후배들이다.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을 만날 때는 언제나 설렌다. 셋이 함께 1년 만에 만난다. 지난번 만남이 불과 몇 개월 전인 줄 알았더니 그게 1년 전이다. 시간의 속도가 느끼는 것보다 빛의 속도로 빠르다.
티아는 코트를 벗을 때 왼팔을 쭉 펴고 벗었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더니 다쳐서 붕대를 감았다고 했다. 의자에 앉더니 왼쪽 소매를 슬쩍 들어 보여줬다. 멍이 엄청 심하게 들었다. 양궁 체험을 하다 활시위에 맞았다고 했다. 어렸을 적 새총놀이하다 잘못해 고무줄에 맞아도 엄청 아픈데, 활시위라니, 그 무겁고 튼튼한 줄이 야들야들한 팔을 때렸다고 상상하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의 이두근에서 손목까지 광범위하게 멍이 들어서 초음파까지 찍으며 혈전이 없는지 혈관이 막힌 곳은 없는지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문제점은 없다고 했다. 티아는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그래도 왼팔이라 다행이에요"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가 양팔 깁스하시고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를 경험했기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한 팔이 자유롭다 해도 머리 감고 옷 갈아입기 등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렵다는 것을. 그런 걱정을 내비쳤더니 티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바지 단추를 채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원피스만 입어요"
양이 좀 많다 싶게 주문한 음식을 셋이 싹싹 비웠다. 접시만 덩그러니 남겼다. 베트남 식당 바로 옆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잠깐 비 온 뒤라 날씨가 좀 쌀쌀해서 멀리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만난 사람 중 최고로 밝고 긍정적이며 자존감 높은 사람 중의 한 명으로 꼽는 티아가 스트레스 때문에 힘든 회사생활을 토로했다. 어쩐지 얼굴이 좀 수척해 보여 팔이 아파서 그런 줄 알았더니, 그것보다는 회사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었다. 건강검진 결과 시력, 청력이 나빠지고 심지어 중증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단다. 결국 퇴사를 표명했는데 아직 수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웬만하면 사람들에게 맞추고 상황을 좋게 보려는 사람인데 너무 안타까웠다.
"저는 제가 우울증인지 몰랐어요. 그냥 이 정도 스트레스는 회사생활하면 다 겪는 거라고 생각하고, 야근 안 하고 6시면 퇴근하니까 견딜만하다 했거든요. 잠도 출장이 잦아서 시차 때문에 못 자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진단을 받고 나니까 그제야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마다 견딜 수 있는 용량이 다르다. 그래서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우울증을 제삼자가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당사자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왜 그래?"와 같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회사에서는 개개인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납득하지 못한다. 어떤 회사는 우울증으로 병가를 신청한 직원의 휴가 기간을 임의대로 깎았다(?). 두 달 신청했는데 한 달만 다녀오라고 한 결과, 해당 직원은 결국 세상과 이별하고 만 사례도 있다. 나도 2023년이 무척 힘든 해였다. 상담받고 쉬면서 조금 회복했는데 그 한 달 쉬고 온 후 심적으로 더 힘든 일이 있었다. 아직 이 영역은 회사가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경력 때문에 1년을 채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 건강이 먼저겠더라고요. 회사직원이 12명인데 제 사 번이 100번이에요"
미영과 나는 경력 만드느라 골병드느니 관두는 게 현명하다고 티아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