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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비극

2025. 3. 29

by 지홀

"띨뿌리"라는 연극을 봤다. 미군이 폭격 훈련을 하던 매향리를 배경으로 한 연극이다. 그곳에 살았던 한 가족의 비극을 중심으로 그 시절 독재로 억압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 제한된 선택지 앞에서 안타까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사람의 얘기가 답답했다. 독재 시절,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던 시대의 비극이 지금의 모습과 겹쳐져 더 난감했다.

패딩을 다시 입은 날(14:08, 14:10, 14:10)

매향리를 검색해 보니 무려 54년간 미군의 훈련장(1951~2005)이었다고 한다. 공연하는 2시간 동안 전투기와 폭탄 터지는 소리만으로도 깜짝 놀라고 시끄러웠는데 그 소리를 하루 8시간씩 들어야 했던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독재가 물러나기 시작하면서 마을사람들은 국가에 물어볼 용기를 내지만 여전한 공산 이데올로기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빨갱이 취급하는 상황에 몸이 움츠러든다. 그런 정부의 대응에 마을주민들은 그 원인을 엉뚱하게도 주인공의 집안 탓으로 돌린다. "빨갱이가 피난 와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나라에서 여기를 훈련장으로 만든 거다"라는 말은 가짜뉴스가 명백함에도 화낼 대상을 찾던 사람들은 그 말을 내뱉는다. 정작 원흉은 따로 있는데, 피해자들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며 어느 국회의원이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국민들은 개, 돼지나 다름없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모자가 날아갔다(14:11, 14:34, 14:35)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고만 하는 권력자들은 따로 있는데, 그들이 입맛대로 만들어내는 말에 세뇌되어 기꺼이 그들의 졸개가 되는 사람들이 연상된다. 무엇을 위해 졸개를 자처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나라에서 빨갱이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참고, 시키는 대로 했던 남주인공은 '이건 아닌데'하면서도 끝까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의지와 용기를 꺾는다. 그러다 마을주민들로부터 빨갱이 소리를 듣게 되자 만신창이가 되고 핵심 폭격 훈련지를 홀로 농성점거하여 억울함을 분출하지만, 결국 죽는다. 개인의 외침은 국가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진에 찍힌 하늘은 그저 맑기만 하다(14:36, 14:53, 17:15)

실제로 매향리 주민들의 호소는 2000년, 한 방송에 알려지고 나서야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 후로도 5년이 지나서야 훈련장을 폐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5년이 지난 후 2010년에 국가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개인의 삶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데 무려 59년이 걸린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해졌고 단체나 조직보다 개인이 우선되는 세상이다.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런데 철 지난 사상이 다시 부활하여 사람들을 옥죌 것만 같아 걱정이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국만 봐도 제대로 된 리더를 찾기가 힘들다. 중국, 러시아, 미국, 태국 등등. 정녕 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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