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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

2025. 4. 3

by 지홀

운전면허증을 갱신해야 하기에 회사 근처 사진관을 검색했다.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진관으로 점심시간에 무작정 갔는데 사람들이 꽤 많았다. 혹시 찍지 못하는 건가 우려했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헤어, 메이크업을 받으려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프로필 사진이 아니라 증명사진이 필요했으므로 거울보고 머리 좀 매만진 후에 바로 찍었다. 여러 컷을 찍은 후에 하나를 고르라고 해서 비교적 웃는 얼굴 사진을 찜했다. 어깨가 너무 솟은 것 같아 좀 내리고 주름살을 없애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런 건 기본적으로 하는 것들이므로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어봤다. 딱히 떠오르지 않아 망설였더니 머리 볼륨을 좀 넣어주겠다고 하여 고맙다고 했다.


세 시간쯤 지나자 카톡으로 사진 파일이 왔다. 기대보다 잘 나와 기분이 좋았다. 눈가 주름살이 많이 없었다. 인화한 사진을 찾았는데 역시 파일과 다름없이 잘 나왔다. 내 얼굴이지만 실제와 조금 다른 얼굴이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원래 생긴 모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잘한 것들을 보정해 주는 기술은 정말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든다.


chatgpt로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모양이다. 몇 년 전 스노 앱으로 얼굴을 만화 스타일로 바꾸는 게 유행이었는데 재미있고 신기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지브리는 더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줘서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의 내가 늙어가는 외모를 안타까워하고 때로 거울 보기 싫어 외면한다면, 지브리의 나는 밝고 건강해 보인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끝내 역경을 딛고 일어날 것 같다. 만화 같은 내 모습을 흐뭇해하는 건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함께 담겨있기 때문 아닐까?

코트를 벗을 수 없다(09:54, 12:17, 12:41)


외관으로 보이는 액면 그대로의 내 모습은 점점 깊어지는 주름, 탄력을 잃은 살, 꺼진 볼 살 등으로 할머니의 모습이다. 그러나 증명사진의 보정된 모습은 30대쯤으로 보인다. 머리 볼륨을 좀 넣고 얼굴형을 좀 더 둥그렇게 바꾸고 팔자주름과 눈가 주름을 많이 없앴다. 웃는 표정 하나만 살아남았는데, 보기 좋다. 현실의 나는 점점 겁쟁이가 되어가는 반면, 사진 속 좀 더 젊은 나는 이 세상 두려운 것들을 잘 헤쳐나갈 것만 같다. 젊다는 그 자체만으로. 가짜지만 사진 속 젊어진 나를 보자 기분이 좋아지고 의욕이 생긴다. 파우스트가 젊음을 위해 영혼을 팔아버릴 만하다.


사진 찍는 일이 점점 싫어지는데 계속 늙어가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내년에 올해의 사진을 본다면 상당히 젊어 보이는 모습일 거다. 보정을 하면 더욱 어려 보일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 재작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노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러므로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라는 말처럼 사진 찍는 걸 피하지 말고 또 잘 찍어봐야겠다.

정오의 태양,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 (12:42, 12:4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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