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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여행

2025. 4. 5

by 지홀

아침에 비가 많이 왔다. 뒤에 맨 배낭이 젖을까 우산을 뒤로 한껏 젖혀 들었다. 봄비였지만 쌀쌀하고 추웠다. 서둘러 용산역으로 향했다. 여수행 KTX를 타기 위해. 기차 시간 10분을 남기고 예매해 둔 좌석에 앉았다. 일행 중 두 명은 이미 타고 있었고 두 명은 광명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지난 모임에서 독후감을 나누기로 했는데 책을 읽지 못해 여수로 가는 기차에서 내내 책을 읽었다. 그렇게 집중해서 내리 4시간을 책 읽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여수역에 내릴 때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2/3는 읽어 뿌듯했다. 하지만, 여행 내내 정작 독후감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여수는 두 번째다. 거의 십 년 전에 혼자 왔었다. 그때는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주요 관광지를 다녔는데 이번에는 다섯 명이 렌터카를 했다. 기차 타고 오는 내내 비가 왔는데 여수 도착하여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비가 그쳤다. 점심식당 먼저 갔다. 백반을 시켰는데 열 첩 반상이 나왔다. 게다가 7천 원이었다. 서울에서는 먹을 수 없는 가격이다. 그곳에서 서대회라는 것을 처음 먹었다. 콜라비와 함께 무쳤는데 회는 부드럽고 콜라비는 아삭했다. 아삭한 식감은 궁채가 단연 압권이었다. 서울에서도 먹어본 것이지만 상추 줄기가 이렇게 아삭할 수 있을까 신기하다. 전라도 답게 갓김치 종류가 많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여수에서 가장 크다는 카페에 갔다. '모이핀(MOI FIN)'이라는 카페였는데 '안녕, 핀란드'라는 한국말이 병기된 걸 봐서 그 뜻인 듯했다. 4층 건물에 루프탑까지 모두 카페였다. 그 아래쪽에는 '모이핀, 오션'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주인이 같다고 한다. 겉에서 보기에는 무슨 리조트같이 생겼는데 예전에 펜션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카페에 들어서자 통창으로 보이는 바다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발코니에는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많았고 카페 안에는 단체로 온 듯한 사람들이 단체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 여수 현지인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보였지만, 타 지역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여수 하늘(15:47, 15:47, 15:48)
가슴이 탁 트이는 하늘과 바다(15:49, 15:54)


카페에서 보는 바다와 작은 섬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런 광경이 좋아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하늘과 바다 시리즈를 그렸었다. 수평선으로 구분되지만, 하늘과 바다의 색이 비슷해 보이는 경계는 서로에게 물들어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와 하늘의 거리는 어마무시하지만 멀리서 보면 꼭 이어져 있는 듯한 광경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아래와 위의 차이가 엄청난 걸 알지만, 저 멀리 수평선에 맞닿은 두 공간은 빈틈이 없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 그 자체로 보인다.


그 카페에선 파운드를 팔았는데 마치 서양의 가정집에서 만든 것 같은 투박함이 좋았다. 예쁜 모양은 아니지만 두툼하고 달지 않아 먹어도 죄책감이 덜했다. 카페가 워낙 크고 넓어서 몇 시간을 창 너머 바다를 보며 멍 때려도 좋을 것 같은 곳이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15:57)

예전 직장 상사의 고향이 여수다. 우연히 우리가 도착하는 날 여수에 계신다고 하여 1일 가이드를 자처하셨다. 여수는 여순 사건 이후 연좌제라는 무시무시한 제도에 얽매어 많은 사람들이 여수를 떠났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자식들을 타지로 유학 보냈다고. 그래서 여수에는 고등학교가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대학도 하나밖에 없고. 자연히 문화예술 분야는 발전되지 못했고 사회 인프라도 부족했다고 한다. 여수 엑스포를 기점으로 많이 발전하고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한 몫했단다.

다도해, 예울마루에서 본 장도(15:54, 15:57, 17:30)

장도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인데 밀물이 들어오면 다리가 잠겨 다니지 못한다고 한다. 그곳에 갤러리를 만들고 미술 전시를 하고 있다고. GS에서 조성한 '예울마루'라는 곳에서 본 다도해와 장도 모습이 장관이었다.


정오가 되면 대포를 쏘아 시간을 알렸다는 오포대 전망대에 갔다. 그곳 마을은 벽화마을이었는데 서울의 '이화벽화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여수는 '이순신'장군 때문에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거북선과 이순신 동상은 물론이고 '이순신 광장', '이순신 공원'이 있고 심지어 빵이름도 '이순신 찹쌀떡'이 있다. "3대(代) 여수 딸기 찹쌀떡"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의 딸기 찹쌀떡은 딸기의 식감과 시원함이 살아있고 떡은 얇아서 찹쌀떡임에도 목이 메이지 않는다. 일본식 화과자 반죽으로 만든다고 하는데 기존에 먹었던 찹쌀떡(찹쌀떡)과 다르게 부드러웠다. '이순신 찹쌀떡'은 흑임자가 들어가 고소하고 견과류가 있어 씹는 맛이 있었다. 입에서 사르르 녹아 사 오고 싶었지만 줄을 너무 많이 기다려야 해서 두 번 갈 수는 없었다. 찾아보니 온라인 주문이 없다. 네이버로 예약하면 현장 픽업이 가능하지만, 택배도 현장에서 주문서를 내야 한다. 다른 지역에는 없고 오직 여수에만 있으니 희소성을 확보한 가게다.

구름층이 여러겹으로 밀도가 높다(17:35, 18:15)

평소에는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관리하는 편이지만, 여행 중에는 친구들이 좋아하고 그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하면 그냥 먹는다. 더구나 여수는 전라도답게 음식이 모두 맛있어서 거부하기 힘들었다. 저녁에 '회'를 먹었는데 한약을 먹은 이후로 끊었던 음식이지만 여수에서 '회'를 먹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식당에서 내온 회는 숙성회로 삼치, 병어, 민어가 나왔다. 본격적으로 회를 먹기 전에 식전 음식으로 찰옥수수 1/5쪽이 나왔는데 이미 찰옥수수로 입맛이 돌아 그 뒤에 먹는 음식 맛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도토리묵무침은 신선해서 리필해서 더 먹고, 미역국도 고소해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삼치회는 김에 묵은지를 올리고 그 위에 회를 양념장에 찍어 올린 후 막장을 넣고 생마늘 얇게 저민 것 하나를 올려 먹는다. 회가 정말 부드럽게 넘어간다. 양념장은 전혀 짜지 않아 회 한쪽을 푹 담가도 괜찮았다. 막장도 짜지 않았다. 병어회와 민어회는 막장이나 간장과 고추냉이 양념에 찍어 먹는데 역시 너무 부드럽고 고소해서 깜짝 놀랐다. 이곳은 매운탕이 나오지 않아 밥을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해 간을 한 밥을 접시에 내오는데, 깍두기 보다 작은 크기로 네모 반듯하게 잘라 나온다. 김 위에 밥을 얹고 그 위에 묵은지, 회를 올려 마치 초밥처럼 먹는다.


불꽃놀이 쇼하는 유람선을 타고 온 후라 9시가 다 되어 저녁을 먹었는데 식당 마감 시간이 9시 50분이란다. 우리는 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먹었다.

저녁 무렵 하늘(18:16, 18:43, 19:16)

저녁에는 해 질 무렵 야경을 볼 수 있는 유람선을 탔다. 주말(금, 토, 일)에 불꽃놀이를 하는 유람선이고 1층은 품바 공연, 2층은 라이브 공연, 3층은 노래방이 있는 대형 유람선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터지는 불꽃을 보는 건 정말 20년은 된 것 같다. 항상 멀리서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다가 최근 몇 년간은 아예 본 적도 없다. 화약 터지는 소리가 싫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행 일정 중 유람선 탑승이 있어 할 수 없이 봤다. 생각보다 소리가 크지 않고 예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처럼 감탄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추위를 피해 혼자 안으로 들어왔다. 나의 불안은 엉뚱한 데서 불현듯 삐져나오는데, 불꽃놀이를 보며 '저 불꽃이 잘못 튀어 불붙으면 어쩌나'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느라 힘들었다.


불꽃놀이에 필요한 화약 비용이 제법 많이 드는데, 한화의 공장이 여수에 있어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지역발전을 위해 싸게 공급하는 모양이었다.

여수 밤바다(19:16, 19:19, 19:19)

오후에 비가 그치고 잠깐 해가 났다가 금세 찬 바람이 불고 일교차가 심해 기온이 떨어지자 추웠다. 저녁 식당에서 나와 밤 10시에 "3대(代) 여수 딸기 찹쌀떡"집에서 30분 넘게 기다렸다 떡을 사고 숙소에 체크인했다. 밤 11시까지 영업한다는데 그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렸다. 그러느라 더 추웠다. 목도리와 핫팩을 가져갔는데 배낭에 넣어놓고 내내 오들오들 떨며 다녔더니 감기에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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