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7
극단의 20주년 기념공연으로 올릴 작품을 신청받았다. 그간 연출하려는 사람이 하고 싶은 작품을 했다. 단원들은 작품을 보고 배우로 참여할지 말 지를 결정했다. 이번에는 20주년 기념이니만큼 가능한 많은 단원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획서에 기획의도와 공연목표를 넣었다. 스무 살이 된 성인이니만큼 사춘기 시절의 혼란스러운 일을 뒤로하고 어른이 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어른은 나와 다른 걸 인정할 줄 아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기획의도는 "우리 모두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발판이 되는 일은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이므로 공연 목표를 관객이 즐기고 감동하는 완성도 높은 공연으로 잡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단원들의 자발적인 참여, 그것도 아주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다.
그래서 작품 선정부터 단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각자 하고 싶은 작품을 신청하고, 신청한 작품을 단원들의 참여로 선정한다. 작품 신청 기간을 하루 앞둔 날까지 접수된 작품은 4개였다. 이 정도만 해도 꽤 괜찮은 결과였다. 솔직히 1개도 접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회사든 동아리든 사람은 많아도 적극적으로 일하거나 참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파레토의 법칙은 정말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는다. 8:2의 법칙. 올봄 정기공연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가 연출지원자가 없기 때문이다. 매년 정기공연은 거의 자발적 지원자가 없어 운영진에서 내부 단원이든 외부 전문가든 연출할만한 사람을 찾아가 '해 달라고' 요청하여 이뤄졌다. 그마저 없다면 운영진 중 한 명이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했다. 올해도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지만 이번 운영진은 과감하게 안 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연출을 누군가 맡더라도 매년 그렇듯이 배우와 스텝 지원자가 적을 것이 예상되었다. 이 또한 할만한 단원들을 설득하여 배우와 스텝을 요청해야 하는데, 이렇게 자발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끌고 가면 힘이 두 배로 든다. 그 과정에서 잡음이 많이 일어나고 갈등 상황도 벌어진다. 잡음, 갈등은 무슨 일을 하든 일어나는 법이지만, 수동적인 자세로 임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천지차다. 같은 갈등이어도 질이 다르다.
운영진에서 봄 정기공연을 접고 가을 20주년 기념공연에 좀 더 힘을 쏟기로 결정한 후, 기획을 맡은 나는 단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불러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따라서 작품 추천 수가 한 개도 없을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한 개도 없다면 망한 거니까. 최악의 경우 운영진이 1인 1개 작품을 필수로 추천하자고 하여 2개 작품은 운영진에서 신청한 것이지만, 2개는 순수하게 단원들이 추천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리 투표지를 만들며 작품의 개요, 줄거리 요약, 작품 주제, 추천자의 추천 이유 등을 정리했다. 접수마감 다음날 바로 투표에 붙여야 했기에 시간을 아끼고 싶었다. 작품 접수 마감 다음날, 파일을 열어보니 무려 8개 작품이 접수되었다. 대박! 생각지도 못한 흥행 성공이다. 단원들이 은근히 관심을 많이 갖고 있구나 싶어 안심했다. 8개 작품 중 신청 기준에 미달인 1개 작품을 제외하고 7개 작품을 대상으로 투표하기로 했다.
투표해야 할 작품이 늘어나 정리하는데만 몇 시간 걸렸다. chatGPT가 아니었다면 더 오래 걸렸을 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의 줄거리와 주제를 정리하는 건 쉬웠으나 낯선 작품은 AI도 웹문서로 잘 찾아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기사를 검색하여 내용을 정리했다. 대본을 가지고 있는 작품도 있었지만 그걸 다 읽고 요약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번 기획일을 계기로 구글 설문양식을 처음 다뤄봤다. 워낙 직관적으로 잘 만들어진 툴이라 비교적 쉽게 만들었지만 일부 기능은 잘 다루는 사람에게 물어보며 만들었다. 이런 작업으로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어 좋다. 앞으로 다른 일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틀간의 투표기간을 거쳐 작품이 결정된다. 선정된 작품을 연출할 사람은 누가 될지, 과연 지원자가 많을지 궁금하다. 이 또한 지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염려되지만, 모를 일이다. 의욕적으로 참여할 사람이 내색하지 않고 수면아래에 있다가 그 모습을 드러낼지도. 부디 수면 위로 많은 단원들이 올라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