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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할 말

2025. 4. 16

by 지홀

하루 종일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었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라 필라테스를 마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스타벅스에 가서 희곡집을 읽었다. 극단의 20주년 기념공연으로 올릴만한가 가늠해 보고, 내가 연출이라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며 읽다가 졸았다. 총 3부로 이뤄진 희곡집은 큰 주제를 놓고 9명의 작가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썼다. 순서대로 읽지 않고 끝 부분인 3부부터 읽었는데 내 취향이 아니었다.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있지만 재미가 없었다. 카페 문을 닫을 시간이라고 하여 집에 와서 2부를 읽었다. 웃기고 재밌었다. 사람 간의 어긋나는 마음을 잘 표현했다. 총 8편으로 이뤄졌는데 극단의 정기공연으로 올려도 될 것 같았다.


한참 책을 읽는 와중, 엄마가 고지혈증에 꿀이 좋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으시고 좋은 꿀을 먹으라고 하셨다. 그 말은 나를 위해 하신 말씀인데 왜 짜증이 났을까? 첫 번째 가설은 작년에 한의원에서 밤꿀을 먹으라는 얘기를 듣고 친구 네트워크를 활용해 양봉하시는 분으로부터 귀한 꿀을 샀다. 그걸 거의 1년째 먹는 중이다. 이미 먹고 있는데 마치 모르시는 것처럼 말해서 짜증 났을 수 있다. 두 번째 가설은 책에 집중하는데 말을 시키셔서 그랬을 수 있다. 세 번째는 이 두 가지 이유가 다 겹쳐서일 수 있다. 이유가 어떻든 내 입에서 나긋나긋, 다정한 말은 나가지 않았다. 신경질과 짜증 섞인 소리가 나갔고 엄마는 황당해하셨다. "밖에서 스트레스받는 일 있었어?"라고 하시며 조용히 물러나셨다. 미안한 마음이 곧 밀려왔지만, 왜 그렇게 화난 소리를 내질러야 했는지 나 자신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햇무리, 햇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아침(11:25, 11:26, 11:26)

남들에게 하는 만큼만 가족에게 친절하자고 다짐한 적 있다. 회사에서 화난다고 있는 대로 성질부리지 않고 친구들의 못마땅한 구석을 보더라도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않듯이, 가족에게도 약간은 화를 누르고 이성적으로 웃는 얼굴로 대하면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밖에 없으니 감정을 밑바닥까지 보이지 말자고. 그러나 다짐처럼 되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그나마 조금 나아진 건 문자로는 친절모드로, 긍정모드로 에둘러서 말할 수 있게 된 점이다. 그러나 얼굴 보고 말할 때는 싫고 기분 나쁜 것들을 그대로 얼굴에 표현하며 말도 곱게 나가지 않는다. 특히 부모님께, 그중에도 엄마께 제일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린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 가장 많은 상처를 준다.


이 나이쯤 됐으면 어른스러울 만도 한데, 부모님에게는 여전히 철없는 자식처럼 군다. 그럴 때마다 못난 내 모습이 싫어진다. 싫으면 반성하고 고쳐야 하는데 그것도 못한다. 그런 마음이 모두 순간, 찰나에 잠깐 스쳐 지나가기 때문일 거다. 곧 잊어버리고 내 마음이 좋을 때는 좋게 대하고 나쁠 때는 나쁘게 대한다. 죄송한 마음을 곱씹고 되새겨 다음에는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후회할 일을 쌓지 말아야 하는데 시간이 흘러가게 그냥 놔둔다. 타인에게 미안했던 일은 오래 마음에 담아두고 어떻게든 사과를 전하려 하면서, 엄마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남쪽은 꽃이 만개한데 아직 잎이 돋아나는 중인 종로의 나무와 하늘, 콧김을 쏟아내는 귀 큰 생물체 (13:42)


희곡집에 "전하지 못한 인사"라는 희곡이 있다. 대사 중 남자가 죽고 나서 알게 된 게 있다고 말한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렇게 말하면 다 풀린다고, 만능열쇠 같다고 말한다.


생전 "고맙다'는 말을 잘하지 않으시던 아빠가 "음식 하느라 수고했어", "맛있게 잘 먹었어"라는 말씀을 가끔 하신다. 엄마에게,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말을 하시기 위해 얼마나 연습하셨을까 새삼 그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미안해, 고마워" 이 말을 남에게는 쉽게 쉽게 건네면서 정작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쑥스러워 말하지 못한다. 나도 연습이 필요하다.

구름이 춤춘다. 저녁노을을 머금은 구름, 눈덮힌 지평선에 피어오른 연기 혹은 영혼의 흔들림 (13:43, 18:5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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