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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숲속

2025. 4. 18

by 지홀

10년 만에 운전면허시험장에 갔다.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앞면은 한국어, 뒷면은 영어로 신청하고 모바일 면허증도 신청했다. 뒷면을 영어로 하면 국제면허증이 없어도 약 60개국에서 운전할 수 있다. 모바일 면허증은 행정안전부에서 운영하는 앱 "모바일 신분증"을 설치하여 등록하면 사용할 수 있다. 휴대폰에 카드, 신분증까지 넣어 놓으니 지갑을 들고 다닐 일이 없다. 시계의 경쟁자가 휴대폰이었는데 이제는 지갑과 가방의 경쟁자도 휴대폰이 되었다. 지갑 없이 다녀도 되므로 가방 없이 휴대폰만 들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여자들도 빈 손으로 출근하는 사람이 많다. 스마트폰 하나면 별 불편 없이 지내므로 꽤 중요한 물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카페나 식당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녀도 잘 없어지지 않는 점이 인상 깊다. CCTV가 많아서 잘 훔쳐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좀도둑이 없다는 건 고무적이다.


암산에 갔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철쭉이 활짝 핀 진풍경을 기대했으나 실패. 철쭉제 기간이었음에도 꽃밭은 피지 않은 곳이 훨씬 많아 실망했다. 작년 친구들과 체험한 치유센터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어 직장 후배와 다시 갔다. 며칠 전, 최소 세 명부터 진행한다고 우리 예약을 취소한다고 알려왔다. 휴가내서 하려고 했던 프로그램이므로 후배와 상의 끝에 한 명분 비용을 더 내고 추가예약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이트에 해당일 예약이 닫혀 더 예약할 수 없었다. 전화로 체험할 인원이 한 명 늘어 결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문의했다. 담당자는 추가인원은 현장결제를 할 수 있으니 세 명으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당일 한 명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왔다고 말하기로 했다. 세 명 비용을 내면 우리를 내치지는 못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안된다고 할까 봐 좀 불안했다. 후배에게 그런 걱정을 늘어놓으며 "여기 온 사람 중에 혼자 오신 분에게 무료 체험 해보시라고 권해볼까?" 하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혼자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봤다. 우리 옆 벤치에 모자를 쓴 여자가 혼자 앉아있었다. 숫기 없는 나는 아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지? 이상한 사람 취급하면 어떡하지?' 하며 망설이다 도무지 말을 걸 수 없어 포기했다. 그런데 넉살 좋은 후배가 성큼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러저러한 우리 사정을 열심히 설명하며 같이 체험하시겠냐 물었다. 그녀는 마침 동네 주민이었고 체험할 시간이 충분하셨다.


나는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어 기뻤고 두 명이라도 체험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게 되어 좋았다. 후배는 오늘 본 얼굴 중 제일 환한 표정이라며 그렇게 걱정이 되었냐며 웃었다. 나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걱정을 한 모양이다. 동행이 생겨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동네주민인 그녀는 이사 온 지 두 달 정도 되었는데 이 곳에 강아지 산책시키러 자주 온다고 했다. 걸어서 온다고 하여 우리는 부럽다고 외쳤다. 이렇게 좋은 곳을 매일 올 수 있지 않냐면서. 그녀는 인상이 좋았고 생판 모르는 사람의 제안을 아무 의심없이 받을 만큼 순수했다. 육아하느라 경력이 단절되어 이제 일자리를 구하려니 어렵다는 말을 하며, 일하고 있는 우리를 부러워했다. 서로 부럽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치유센터로 이동했다. 현장에서 1만 원을 결제했다. 동네주민이 본인의 몫을 내겠다고 했으나 우리가 냈다. 애초 감당하려고 했던 비용이고 같이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고 했다.

기온이 훅 올라가 여름날씨 같다 (10:01, 10:02, 11:34)


오늘 체험은 "휴식 숲" 프로그램이다. 먼저 치유센터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바위산인 불암산과 복숭아꽃나무가 예쁘게 핀 숲을 바라볼 수 있는 선베드가 놓여있다. 한 사람씩 앉아 탁 트인 전경을 바라봤다.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앞에 보이는 산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고 시원했다.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 산과 봉우리가 절경이었다. 그 아래쪽 숲에 각종 꽃이 핀 숲 속은 그림이었다. 잠시 느긋하게 선베드에 기대앉아 햇빛을 만끽했다. 비타민D가 많이 합성되도록. 잠시 머문 후 옥상에 심은 각종 허브잎을 만져보았다. 스피아민트, 초코민트, 페퍼민트, 라벤더 등 손으로 슬쩍 문질렀는데 향기가 묻어났다. 산림치유사는 이렇게 저마다 다른 향기를 가진 식물처럼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한마디로 "지 꼴대로 사는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익히 아는 말인데 새삼 마음에 닿았다.


옥상에서 내려와 숲길로 갔다. 그곳에 핀 노란 장미, 복숭아꽃, 조팝나무 등을 천천히 보며 산림치유사 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었다. "꽃잎이 지는 건 자기 할 일을 다해지는 것이므로 슬퍼할 일이 아니다", "지금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집중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지금 여기, 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 비우는 것과 같다" 등의 말씀을 듣는데 후배가 눈물 난다며 철학수업 같다고 미소를 지었다. 동네주민은 사춘기 자녀들 때문에 힘든지 "갱년기와 사춘기가 싸우면 갱년기가 이긴다는데 요즘엔 사춘기가 이기지 않아요?"라고 반문하듯 혼잣말을 하더니 "일하면 바빠서 갱년기가 온 줄도 모르게 지나간대요" 라며 연신 일하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산림치유사는 바쁘면 심적 우울감을 느끼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신체변화에 따라 힘든 건 피해 갈 수 없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과 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불암산 철쭉제인데 철쭉이 많이 피지 않았다 (11:35, 11:37, 11:38)

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 앉았다. 5도 정도 몸을 기울일 수 있게 제작된 의자는 등을 기대면 하늘이 자연스레 보인다.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다음은 편백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 누워 휴식을 했다. 머리카락을 살살 흔드는 바람에 잠이 스르륵 밀려왔다. 아무 잡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임벨 소리에 깬 후 맨발로 돌을 밟았다. 햇빛에 따듯하게 달궈져 딛기 좋았다. 돌 다음에는 흙을 밟으며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 잔디밭에서 런지를 하고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몸을 깨우며 아이처럼 신나게 움직였다. 실내로 들어가 느리게 호흡하는 법을 배우고 원적외선이 나오는 나무통에 들어가 땀을 쫙 뺐다. 다음에는 안마 침대에 누워 전신을 두드리는 안마에 몸을 맡겼다. 마지막 코스로 도라지차를 마시며 체험 소감을 서로 나누었다.


지난 11월에 했던 프로그램과 다른 내용이어서 더 좋았다. "휴식숲"이란 제목답게 계속 누워서 눈을 감고 호흡한 덕분에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동네주민 그녀는 뜻밖의 힐링에 고마움을 전하며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했다. 다음에 차라도 사겠다고. 우린 그제야 통성명을 하고 헤어졌다.


코스 체험 중 숲에서 다른 팀을 만났는데 그 팀은 5년째 힐링프로그램을 이용하는 팀이라고 했다. 10명이 모이면 매주 다른 맞춤 프로그램을 제공한다고 했다. 나중에 은퇴하면 친구들을 모아 정기적인 체험을 해야겠다고 마음에 담았다. 불암산에는 치유센터 외에 나비정원, 카페, 갤러리가 있는데 모두 노원구청 직영인 듯하다.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질 좋은 체험을 할 수 있어 횡재한 것 같다. 지역주민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위한 치유센터는 정말 구청에서 잘하는 일 중 하나다.


체험하는 동안 휴대폰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 온전히 힐링하는 시간을 위해 디지털을 멀리하는 거다. 강제로 멀리해야 할 만큼 스마트폰이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틈나는 시간을 활용한다는 명목으로 짠테크를 하고 인스타를 보다가 추천 콘텐츠를 아무 생각 없이 클릭한다. 시간은 휘리릭 지나간다. 덕분에 심심할 틈 없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지만 해야 할 일을 제때 못하는 병폐가 일어난다. 늘 적정한 선을 지키는 일이 어렵다. 내 의지로 하기 어려우면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과하지 않도록, 넘치지 않도록 조절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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