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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한 날

2025. 5. 21

by 지홀

작년 12월에 여행 가려던 친구들과 호캉스를 하기로 했다. 엄마가 다치셔서 여행을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만남도 미뤄졌다. 오랜만에 만나니 밤새 수다를 떨자고 하여 호텔방을 잡았다. 체크인 후 인사동 거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으려고 했는데 호텔을 나서자마자 펼쳐진 물건의 유혹에 굴복했다. 늘 지나던 거리이고 관심을 기울여본 적 없던 가게들인데, 친구들과 여행 온 기분 탓인지 가게마다 놓인 물건이 예뻐 보였다. 내 첫 구매 아이템은 가죽가방이었다. 한 눈에도 질이 좋아 보였고 가죽 색과 디자인이 멋졌다. 가격은 내게 아주 합리적이었다. 근 5년간 가방을 산 적 없다. 더구나 요즘은 도시락 가방을 들거나 아예 빈손으로 다니거나 노트북 때문에 에코백을 들었다. 생일선물로 받은 가벼운 에코백을 즐겨 들었다. 그런데 가죽이라니. 요즘 나의 생활과 맞지 않는 아이템임에도 눈을 떼기 어려웠다. 게다가 가벼웠다. 다양한 모양의 가방을 크기별, 색깔별로 사고 싶을 만큼 마음이 갔다. 최종 두 가지 색상의 가방을 두고 어떤 것을 살까 고민하는데, 지나가던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 외국인이 자기라면 저걸 사겠다고 훈수를 두고 갔다. 얼결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좀 더 망설이다가 더 마음이 가는 가방을 골랐다. 가방이 든 쇼핑백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걷는데, 누군가 내 등을 두드려 돌아보니 그 외국인이 어떤 가방을 샀냐고 물어본다. 그녀가 추천한 가방을 샀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다른 가방을 샀다고 했더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갔다. 오지랖 넓은 사람이지만,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기본적으로 선하다. 또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내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나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에.


가방을 시작으로 옷을 여러 개 구매했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고 예상하지도 않은 소비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최근에 나를 위한 소비는 먹는 것 외에 별로 없었으므로. 심지어 내 스타일이 아닌 옷을 샀다. 평소라면 잘 사지 않았을 텐데 친구들의 '잘 어울린다'는 한마디에 혹했다. 얼마나 자주 입을지는 미지수지만 틀에 박힌 내 모습을 깨려면 때로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 중이 제 머리 깎지 못하듯이.

봄날이다 (08:41, 08:41, 08:52)
오후는 여름날이었다 (13:40, 13:47, 14:20)
공원 뒤로 지는 태양(15:19, 18:2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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