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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신경

2025. 5. 22

by 지홀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 어젯밤부터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온갖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몸은 머리 감고 세수하고 샤워하고 이 닦으려고 자동으로 움직이는데 머릿속은 혼란했다. 꿈을 꾸는 듯 두서없는 장면들이 떠오르는데 이러다가는 머릿속 기억이 사라질 것 같았다. 너무 뒤죽박죽이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신을 부여잡으려고 엄마, 아빠, 동생들 이름을 반복해서 읊었다. 정신이 멀쩡한지 확인하려고 반복해서 읊었다.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까지 말리는 일련의 행동에선 거침이 없었다. 늘 하던 대로 몸은 움직였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친구들에게 물었다. 씻기 전 끔뻑 졸았었는지. 친구들은 아니라고 했다. 이상했다. 계속 머리가 맑지 않았다.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는 다 들리는데 머릿속으로 입력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자려고 누웠는데 머리가 저리고 왼팔이 저렸다. 오한이 났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는데 추웠다. 내 몸이 좀 이상한 거 같다고 했더니 희경이가 내 침대로 건너와 손을 잡아줬다. "얘 왜 이렇게 손에 힘이 세?"라며 이불을 목까지 덮어줬다. 조영이는 물을 끓여 따뜻한 물을 주었다. 춥다고 했더니 객실에 비치된 가운을 입혀줬다. 무서웠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아서. 그러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침 6시인가 7시쯤 눈을 떴는데 오한은 나지 않았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으나 여전히 맑지 않고 기운이 없었다. 머리와 왼팔은 여전히 조금 저렸다. 뒷목을 마구 마사지하고 열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눌렀다. 친구들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전혀 배고프지 않았으나 호텔 조식이 포함되었기에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먹는 둥 마는 등했다. 친구들도 입맛이 없어 보였다. 원래 계획은 12시 체크아웃이므로 천천히 씻고 더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지만, 난 기운이 없었다. 희경이가 마침 예전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 갔던 얘기를 했다. 자율신경계 관련 문제였다면서 병원에서 평소 습관과 운동 동작을 아주 상세히 설명해 줘서 좋았다고 했다. 구세주를 만난 듯, 희경이에게 같이 병원에 가달라고 했다. 재미나게 놀지 못하고 흥을 깨어 미안했지만, 기운 없는 얼굴로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늘은 맑고 나는 아프다(16:19, 16:20)


병원에 도착하여 증상을 말했더니 자율신경 측정(?)을 한다고 했다. 난 경동맥 초음파도 해달라고 했다. 머리와 손발이 저린 이유가 혈류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했다. 누운 상태에서 양 팔목, 양 발목에 뭔가를 부착하여 측정했다. 몇 분 후에 검사하는 의사가 복식호흡을 해보라고 했다.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라고. 시키는 대로 호흡에 집중하자니 5~6년 전에 응급실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숨쉬기가 어렵고 쓰러질 것 같았는데 간호사가 비닐봉지를 주고 심호흡을 하라고 했다. 응급실에서 치료 순서를 기다리며 심호흡을 반복하는 사이 숨을 제대로 쉬게 되었고 정신도 맑아졌던 기억에, 이번에도 복식호흡을 하고 나면 좀 나아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검사를 마치고 희경이와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정신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눈도 또렷해지는 것 같고. 의사는 경동맥 검사지를 보여주며 혈관의 모양이 이 나이라면 있을법한 모양이므로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고지혈증 약을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자율신경 측정결과는 나빴다. 중간수치보다 훨씬 낮게 나왔는데 복식호흡을 하며 쟀을 때는 중간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치가 올랐다. 결론은 '과 긴장' 상태라면서 스트레스가 높다고 했다. 처음엔 동의하기 어려웠다. 일상적인 스트레스는 누구나 있으므로 특별히 높다는 자의식이 없었으므로. 의사는 뇌졸중은 아니라고 하며 불안해할 필요 없다고 했다.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두 번째로 듣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당황스러웠다. 옆에 있던 희경이는 좀 놀란 눈치였으나 별 말 하지 않았다. 의사는 약 먹고 내일 전화하라고 했다. 절대 불안해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더운 여름날이 다가온다(16:44, 17:14, 17:19)


작년 겨울 무렵부터 머리가 자주 저렸다. 그럴 때마다 이마를 마구 문지르거나 뒷목 마사지를 했다. 그러면 좀 가라앉았다. 몇 달 전부터는 부모님께 과하게 화를 냈다. 별 말 아닌 말씀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짜증 나고 화가 났다.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과한 반응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화 조절이 잘 되지 않으면 병이 생길 것 같았는데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는데,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힘들 때마다 복식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켜야겠다. 그러나 원인은 잘 모르겠다. 스트레스 지수가 왜 높은지.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있을 테지만, 마음의 체력이 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다만, 한바탕 울고 났더니 좀 홀가분해지긴 했다.


며칠 맑지 않은 정신이었기에 브런치에 글을 매일 올릴 수 없었다. 글쓰기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매일 글 쓰는 강박보다는 몰아서 쓰더라도 매일의 글을 쓰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나름, 나를 편하게 만드는 방법 중의 하나다. 자기 합리화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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